[김성재의 국제금융 인사이트]
137년 전통·174명 노벨상 수상 보건연구원
지원비 51조원 규모···한국 예산 절반 넘어
설비 유지·인건비 등 15% 이하로 감소 명령
민주당 강세 22개 주 법무부 장관 소송 제기
미국의 국립보건원(NIH, National Institutes of Health)은 137년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바이오·의약·건강 관련 리서치 기관이다. 워싱턴 근교 메릴랜드주에 자리 잡은 37만 평(약 122만3000㎡) 규모의 캠퍼스에는 75개의 연구동에서 2만명 가까운 직원이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웬만한 대학교를 넘어서는 규모다.

이뿐만 아니다. NIH가 직접 운영하는 연구기관은 본부가 자리 잡은 메릴랜드주의 다른 두 도시를 포함해 듀크 대학, 노스캐롤라이나 대학(UNC)에 인접해 리서치 트라이앵글 파크라 불리는 노스캐롤라이나, 북쪽 산악지대인 몬태나와 남서부의 사막지대인 애리조나까지 펼쳐져 있다.
NIH가 과학 발전과 연구에 이바지한 공로는 엄청나다. NIH는 2020년 C형 간염 바이러스를 발견한 업적으로 노벨생리학·의학상을 받은 하비 올터(Harvey J. Alter)를 비롯한 여섯 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이들은 NIH가 직영하는 연구동의 실험실에서 연구를 수행했다. 연구 분야도 생리학뿐만 아니라 화학과 의약 분야를 포함한다.
NIH의 일부로 1962년 설립된 종합의과학연구원(NIGMS, National Institute of Medical Sciences) 한 곳이 지원한 과학자 가운데 97명이 노벨상을 받았다. 작년에도 노벨 화학상을 받은 데이비드 베이커(David Baker)와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한 빅터 앰브로스(Victor Ambros)와 개리 러브컨(Gary Ruvkun)이 NIH의 연구 지원비인 그랜트(grant)를 받았다.
매사추세츠 의과대학 교수인 빅터 앰브로스는 코로나19 백신과 밀접하게 연관된 mRNA를 발견했다. 거의 매년 NIGMS가 연구비를 지원한 학자들이 노벨상을 받았다. NIH 전체로 보면 1932년 이후로 이 기관의 지원을 받아 노벨상을 탄 학자의 숫자는 무려 174명에 달한다. 연구 분야는 생화학, 의학, 화학을 비롯해 물리학, 경제학까지 포괄한다.
무려 9명의 경제학자가 NIH의 연구 지원을 받았다. 2020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버클리 대학의 데이비드 카드(David Card) 교수는 노동시장에서 이민과 교육의 중요성에 관해 연구했고 1972년 수상자인 게리 베커(Gary Becker) 시카고 대학 교수는 차별, 범죄와 휴먼 캐피털의 중요성에 관해 연구했다.
물론 이런 업적이 그냥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NIH는 전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리서치 그랜트 공여 기관이기도 하다. 2023 회계연도에 NIH는 2700여 개의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일하는 과학자 3만여명의 연구를 도왔다. 미국 내에 존재하는 연구기관 거의 전부를 지원해 왔다.
최근 NIH 지원비의 규모는 한 해에 350억 달러(약 51조원)에 달했다. 한국 정부 예산의 절반이 넘는 규모다. 2위에 해당하는 영국 생명의학 연구재단 지원비의 수십 배에 해당한다. 이들이 수행하는 연구 프로젝트 숫자는 5만9000개에 달한다고 한다.

NIH가 지원한 연구비로 교수들은 불철주야 실험실(랩)을 운영해 과학 문명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한다. 이들은 NIH 그랜트를 바탕으로 미국 학계로 진출해 연구를 이어가려는 전 세계 박사 후 연구원(포스트 닥터, Postdoctoral researcher, 포닥)을 채용한다. NIH 그랜트는 청운의 꿈을 품고 가족과 함께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 포닥에게는 희망의 다리 역할을 했다.
이들 포닥의 혼신을 다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과학이 발전하고 인류 문명은 희귀 질환과 전염병 그리고 팬데믹의 위기를 넘겨 왔다. 대부분의 교수와 랩 운영자는 NIH 그랜트를 받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연구 성과를 내 대학의 리서치 위상을 높이기 위해 건강을 해치면서 연구에만 전념했다.
이들이 받는 그랜트는 랩의 운영비와 연구자의 최소 생활비를 커버할 정도에 불과했다. NIH 그랜트를 받아 사치를 일삼거나 흥청망청 쓰기는 매우 어렵다. NIH 그랜트는 특히 재정 상황이 열악한 주립대학에는 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구명줄이기도 했다.
그렇게 연구에 대한 열의 하나로 지탱하던 미국 대학과 연구기관은 지금 공포와 경악에 시달리고 있다. 숫자로 셀 수 있는 매출액 상승이라는 가시적 성과가 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부동산 개발업자 출신 대통령이 NIH를 비롯한 연방정부의 예산 통제권을 거머쥐면서 조직들을 쥐어짜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과 성향이 비슷한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를 정부효율부(DOGE, Department of Government Efficiency) 수장으로 앉히고 연방정부 내의 비효율적 예산 사용을 척결하라 요청했다. 어느 정부에서나 예산은 비효율적으로 사용될 수 있고 부패한 정부일수록 예산이 유용되는 정도는 심해진다.
하지만 미국은 법과 시스템이 가장 완비된 나라 가운데 하나다. 각종 비용의 책정과 사용은 대개는 투명하게 관리된다. 한 사람이 서명 펜을 휘둘러 결정하는 구조가 아니라 위원회를 통해 정책을 정하고 시행한다. 이런 나라에서 자금 유용을 이유로 대기는 어렵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트럼프 정부는 최근 NIH에 연구 그랜트에서 간접비(indirect costs)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랜트의 15%가 넘지 못하게 하도록 했다. 간접비는 행정설비비용(Facilities & Administrative costs)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랩의 연구 설비 관리와 연구원의 인건비, 기타 연구 수행에 연관된 각종 필수 비용을 가리킨다. 간접비의 인하를 통해 매년 40억 달러 상당의 예산을 줄이겠다는 계획이다.
연구는 사람이 설비를 이용해 시간을 투입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간접비의 비중이 적게는 30%, 많게는 70%까지 이를 수밖에 없다. 이를 최저 수준 아래인 15%로 낮추라는 것은 랩의 운영을 거의 중지하라는 요구에 가깝다. 신규로 포닥을 채용하기도 힘들 뿐 아니라 대학원이나 학부 학생에게 장학금 형태로 지원하던 연구비마저 끊길 위기에 처했다.
꿋꿋이 연구실을 지키던 학자들은 심한 모욕을 당했고 좌절감을 넘어선 공포를 느끼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22개 주의 법무부 장관이 NIH 그랜트의 간접비 15% 상한선 적용을 중지하라고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법원은 적법성과 정책의 향후 영향을 평가하기 위한 청문절차에 돌입했다. 문제는 트럼프 정부가 행정명령을 통해 법률의 효력을 무력화하듯이 법원의 판결도 무시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연방정부 약화에 대한 소신으로 무쇠라도 씹어먹을 기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럼프가 미처 깨닫지 못한 중요한 요소가 있다. NIH 그랜트를 삭감하면 트럼프가 싫어하는 유명 대학의 교수들뿐만 아니라 각종 주립대와 거의 모든 사립대학의 학생이 직접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막 과학 분야에서 꿈을 키우기 시작한 예민한 나이에 장학금이 끊긴다면 학생과 학부모는 크게 분노할 것이다. 이는 트럼프 진영에 의외의 정치적 일격이 될 수도 있다.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성재 퍼먼대 경영학과 교수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종합금융회사에서 외환딜러 및 국제투자 업무를 담당했다. IMF 외환위기 당시 예금보험공사로 전직해 적기 정리부와 비서실에서 근무했다. 2005년 미국으로 유학 가서 코넬대학교 응용경제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루이지애나주립대에서 재무금융학으로 경영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대학에서 10년 넘게 경영학을 강의하고 있다. 연준 통화정책과 금융리스크 관리가 주된 연구 분야다. 저서로 '페드 시그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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