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재의 국제금융 인사이트]
트럼프, 미성년자 성 매수 의혹 후보 지목 후
상원 표 과반 확보 자신감 잃어···결국 사퇴
美 '룰 무시' 대통령, 의회가 힘 안 실어준다
'온건파' 원내대표, 관세 기조에 영향 줄 듯
도널드 트럼프가 대선에서 압승한 뒤 미국 민주당 진영은 연일 진흙탕 싸움이 지속되고 있다. 워싱턴의 노스트라다무스라 불리며 카멀라 해리스와 민주당의 낙승을 전망했던 앨런 릭트먼(Allan Licktman) 아메리칸 대학교 역사학 교수는 틀려도 멍청하게 틀렸다고 공격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민주당 진영의 논객들은 선거 참패의 원인을 둘러싸고 하루가 멀다 않고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느라 바쁘다. 오랜 민주당의 실세로 두 차례에 걸쳐 8년간 권력 서열 3위의 연방하원 의장을 지낸 낸시 펠로시는 조 바이든 대통령이 빨리 물러나지 않은 것이 선거 패배의 근본 원인이라 지적하기도 했다. 여기엔 바이든이 일찍 물러섰더라면 당내 경선을 치러 다른 후보를 뽑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복선이 깔려 있다.
릭트먼 교수는 자신의 대통령 선거 예측 모델의 유용성을 방어하면서 민주당의 선거 전략이 엉망이었다고 목청을 높였다. 하지만 결국 결론은 민주당이 내세운 해리스가 제대로 자질을 갖춘 준비된 후보가 아니었다는 사실로 모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절망하면서 고뇌에 빠진 민주당 진영에 활로를 뚫어준 것은 역설적으로 트럼프였다. 그가 자신에 대한 충성도에 따라 지명한 장관 후보들의 자격과 과거 행적이 문제가 되면서 벌써 낙마하는 후보가 나왔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논란의 중심에 선 것은 맷 게이츠(Matt Gaetz) 법무장관 후보였다. 7년여 전 미성년자와의 부적절한 접촉 의혹이 문제가 됐다.
민주당 측은 공세의 고삐를 바짝 쥐었고 트럼프 측은 즉각 방어에 나섰다. 사법기관이 그를 수사했지만 한 건도 기소에 이르지 못했다고 항변했다. 여기에는 숱한 사건에 연루되어 몇 차례 기소되어 재판까지 받고 있는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지 않았느냐는 반론 아닌 반론이 섞여 있기도 하다. 연방하원 윤리위원회까지 나서서 세밀하게 조사했지만 징계 없이 넘어간 사안이라고 주장했다.
트럼프도 게이츠를 사퇴시킬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노’라고 단호히 대답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이 사건의 피해자를 대변하는 증인이 진보 진영 뉴스 채널에 출연해 사건의 전말을 비교적 상세히 진술하면서 사태의 전개 방향이 급선회했다. 심각한 무엇인가가 있다고 직감한 민주당은 공화당이 지배하는 하원 윤리위원회에 게이츠 조사 보고서를 공개하라고 압박했다.
하원 윤리위원회가 조사 보고서를 공개하지 않자 의혹은 일파만파로 커졌다. 이런 와중에 지난주 목요일 게이츠 후보가 법무장관 후보에서 자진해서 사퇴하겠다고 발표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가는 길에 암초가 되고 싶지 않다는 이유를 댔다. 상당히 의아했다. 트럼프가 장관 후보자로 지명하자마자 연방하원 의원 자리까지 내던졌던 강성 충성파가 좌파 언론이 공격한다고 해서 스스로 물러날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자 사퇴 이유의 전말이 드러났다. 트럼프 당선자가 게이츠 후보에게 전화해서 자신은 상원에서 ‘그 표’를 가지지 않았다고 말한 것. 장관 후보자가 임명에 필요한 상원 인준을 받으려면 과반수의 득표가 필요한데 그 표를 트럼프 자신도 확보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

비록 공화당이 상하 양원을 휩쓰는 대승을 거두었고 100명 정원의 상원에서 52명의 의원이 공화당 소속이지만 트럼프는 게이츠 인준에 필요한 51표를 장담할 수 없었다. 트럼프로서는 표결이 가부동수로 가더라도 상원의장인 JD 밴스 부통령이 캐스팅 보트로 찬성할 수 있기에 50표만 모으면 된다. 따라서 트럼프는 게이츠 임명에 최소 두 명의 공화당 소속 상원의원이 반대할 것으로 내다봤다고 해석할 수 있다.
게이츠 사퇴 소동은 역설적으로 트럼프 권력의 한계와 아킬레스건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몇몇 언론은 상원이 반대하면 휴회(recess)한 틈을 타서 우회적으로 장관 임명을 강행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워싱턴의 권력 메커니즘을 잘 안다면 쉽게 할 수 없는 전망이다.
권력 분립은 미국 헌법의 가장 중요한 근본정신 가운데 하나다. 대통령이 이를 무시하면 의회는 당연히 크게 분개한다. 의회는 여야를 떠나 미국인이 중시하는 ‘룰’을 무시한 대통령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정부 예산과 세금을 매년 심사하는 의회의 협조를 받지 않으면 대통령의 권력은 식물로 전락한다.
이를 잘 아는 트럼프가 한 걸음 물러섰다고 볼 수 있다. 트럼프의 게이츠를 대체할 인물로 팸 본디(Pam Bondi) 전 백악관 특정직 법률 보좌관을 지명했다. 그는 1965년 생으로 2019년까지 8년간 플로리다주 검찰총장을 역임했다. 2020년 트럼프 탄핵이 진행될 때 법률 자문을 제공했다. 그의 경력으로 볼 때 법무장관 인준은 무난해 보인다.
트럼프는 게이츠의 사퇴로 한숨 돌렸다. 하지만 민주당 진영은 트럼프가 뽑은 장관 후보자들에 대한 공세를 늦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피트 헤그세스(Pete Hegseth) 국방장관 후보자다. 그도 7년여 전 출장 중 캘리포니아의 한 호텔 방에서 여성을 강제로 성폭행한 의혹을 사고 있다.
헤그세스는 경찰이 샅샅이 조사했음에도 자신은 형사 소추되지 않았다며 문제없다는 입장이다. 대부분의 정치 분석가도 그의 상원 인준 가능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그가 범행 의혹 상대방의 입을 막기 위해 금전적 대가를 지급한 사실이 밝혀졌다. 헤그세스는 미투(MeToo) 운동의 표적이 되지 않기 위해 합의한 것뿐이라 말했다.
헤그세스가 또 낙마할 경우 트럼프뿐만 아니라 집권 여당의 입지도 약해질 가능성이 크다. 공화당 상원 의원들도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상황이 자꾸 어렵게 흘러가자 충성도와 대충 매체 노출도에 따라 즉흥적으로 장관 임명을 거듭하던 트럼프도 신중해졌다. 국무장관과 더불어 트럼프 내각 내 가장 중요한 포지션인 재무장관 인선에는 시간을 두고 고심을 거듭하는 기색이 짙어 보인다.

당초 재무장관으로 유력하게 거론되던 하워드 러트닉(Howard Lutnick)을 상무장관 후보로 지명했다. 유대계 억만장자인 러트닉은 오랜 트럼프 강성 지지자로 대통령 인수위원회 공동 위원장을 맡고 있는 실세다. 강경파 러트닉을 통상 쪽으로 보내면서 재무장관에는 그보다 합리적이고 온건한 인물이 선임될 가능성이 커졌다.
정부 예산과 조세를 다루어야 하는 재무장관 후보에서 자신의 측근을 배제한 것은 의회와의 관계를 고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게이츠를 법무장관 후보로 지명한 뒤 공화당 내 상원의원들이 고분고분하지도 만만하지도 않음을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차피 트럼프는 4년이면 정치 인생이 끝난다. 하지만 상원의원 임기는 6년이고 2년마다 돌아가면서 1/3씩 선거가 있다. 또한 상원의원 중에는 산전수전 다 겪은 다선 의원이 수두룩하다. 이들이 공화당의 이해관계를 떠나 트럼프의 눈치만 보고 그의 명령에 복종할 까닭이 없다. 상원에 대한 트럼프의 영향력이 제한적이라는 얘기다.
최근 실질적으로 상원을 이끌어갈 공화당 원내대표로 선출된 존 쑨(John Thune) 의원도 트럼프 직계로 분류되지 않는 인물이다. 리트닉이 평소 강력하게 주장한 대로 향후 공격적으로 추진할 관세 인상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다. 합리적인 의원이라면 관세 인상으로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을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제 세계와 미국 경제의 향후 운명은 미국 상원의 손에 달린 듯 보인다.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성재 퍼먼대 경영학과 교수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종합금융회사에서 외환딜러 및 국제투자 업무를 담당했다. IMF 외환위기 당시 예금보험공사로 전직해 적기 정리부와 비서실에서 근무했다. 2005년 미국으로 유학 가서 코넬대학교 응용경제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루이지애나주립대에서 재무금융학으로 경영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대학에서 10년 넘게 경영학을 강의하고 있다. 연준 통화정책과 금융리스크 관리가 주된 연구 분야다. 저서로 ‘페드 시그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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