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
이러다 갑자기 끝물이라 하겠지?
단풍 찾다가 충청도 여행은 실컷
지난주에 설악산에 갔다가 너무 일러 단풍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게 아쉬워 다시 길을 나섰다. 이번에는 전북 무주 덕유산이다. 이런, 아직도 단풍은 제대로 물들지 않았고, 덕분에 충청도 가을 여행만 실컷 했다. 오히려 더 좋았다.
이 가을 공주 공산성은
서울에서 덕유산까지는 세 시간이면 충분하지만, 일찍 도착해 봐야 만날 사람도, 할 일도 없다. 마침 공주를 지난다. 옆으로 빠져 커피 한잔하며 가을 냄새나 맡아봐야겠다.
카페를 찾다 보니 공산성까지 왔다. 백제 도읍 웅진의 성(城)이자 금강을 끼고 있는 요새다. 산성이 올려다보이는 멋진 카페에서 잠시 쉰 후 올라가 보았다. 오래전에 비 온 후 미끈거리는 성벽 위 흙길을 걷느라 고생한 적 있는데 지금은 아주 깔끔하게 정비되었다. 한쪽에서는 아직도 뭔가 발굴 작업이 진행된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 강가에 이르니 영은사라는 절이 나온다. 여기 기억난다! 80년대에 친구들과 지나가다가 시끌시끌해서 봤더니 절에서 기숙하던 청년들(고시 준비생이었던 듯)이 한 방에 모여 화투 치다가 우리를 보곤 깜짝 놀라 판을 덮었다. 그때와는 절 분위기가 아주 다르다. 조용하고 깊은 느낌이다.
높이 110m의 공산을 둘러싼 호젓한 성곽길은 적당한 높낮이가 있어 다리 운동도 꽤 된다. 시원하게 펼쳐진 금강, 예쁜 감나무, 숲이 뿜는 가을 냄새와 햇살, 쉴 수 있도록 꾸며놓은 정자들…. 서울에서 한 시간 반 거리에 이런 산책 코스가 있다니! 자주 와야겠다. 여기만으로 아쉽다면 옆 부여의 부소산성도 묶으면 가을 사색 여행에 딱 좋겠다.

다섯 시인데 배가 출출하다. 마침 공산정(亭)에 오르니 공주국밥이라는 큰 간판이 보인다. 가 봤더니 예전에 시내에서 국밥으로 유명하던 이학식당이 확장 이전했다. 잘 찾아왔다. 이 맛이었다. 얇게 깐 대파와 소고기가 어우러진 부드럽고 달콤한 맛, 밥을 말아 한 그릇 뚝딱 비우고 다시 길을 떠난다.
올가을 단풍, 내 끝까지 쫓아간다
전주에서 하룻밤 자고 덕유산에 왔다. 산에 오르며 단풍을 볼 요량이었다. 구천동부터 정상인 향적봉까지는 무리인 것 같아 스키장 곤돌라를 타고 설천봉에 가서 향적봉에 올라 능선을 적당히 걷기로 했다.
그런데 곤돌라 장소에 가 보니 일반 관광객만 조금 보일 뿐, 가게도 다 닫고 아주 썰렁하다. 게다가 산 위에는 단풍이 전혀 없다. 엊그제 영하 8도였다고 해서 두꺼운 옷을 입었는데 오늘은 왜 이리 더운지.
지난번 설악산은 단풍이 없었어도 산 자체가 멋졌지만 덕유산은 예쁜 산이 아니다. 20년 전 백두 대간을 종주할 때 덕유산은 너무 멋대가리 없이 힘들기만 해서 다시는 안 오리라 생각했다. 언뜻 보면 능선의 표고차가 작아 쉬울 것 같지만 큰 바위와 좁은 길이 계속되니 체력이 바닥난다.
역시나 향적봉-중봉-백암봉의 2.1km 구간은 가장 평탄한 구간인데도 길이 예쁘지도 친절하지도 않다. 극기 훈련도 아니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시간 낭비다. 계획을 바꿔 중봉에서 돌아섰다.
내려와서 차를 몰고 구천동으로 왔다. 진작에 여기로 올 걸 그랬다. 입구에서부터 단풍이 나타난다. 시간이 늦어 어사길 1코스까지만 갔다가 돌아섰다. 짧지만 눈에, 마음속에 단풍꽃을 충분히 옮겨 심으며 가을 정취를 제대로 느꼈다. 역시 단풍은 산 정상보다는 아래쪽 계곡인가 보다.

그래도 아직 덜 들었다. 지난 글(11월 1일 자)에서 “지금 출발하면 절정일 거”라고 했는데, 양치기 소년처럼 다시 반복한다. 이 글 보고 출발해도 충분하다. 올해는 11월 말에 절정일 거라는데 너무나 상식에 벗어난 그 말을 믿어야 할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다. 사람들이 ‘금값 백만원, 1달러 2천원, 코스피 7500’처럼 되는대로 내뱉는 것 같아도 어느 정도 그렇게 되어가니 말이다. 제발 자연의 섭리만큼은 사람들 입방아대로 되지 않길…. 짧은 단풍 구경을 마치고 옥천으로 향한다.

옥천, 활기차고 재미난 곳 같아
지친 몸으로 호텔에 들어가 씻고 저녁 먹으러 나왔다. 차가 많이 밀린다. 상점도 많고 사람도 많다. 던킨과 올리브영이 있으면 일단 사람이, 특히 아이들이 있다는 증거다. 카페도 많다. 젊은 층도 많은가 보다. 대전 근처라 그럴까? ‘지방 소멸’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옥천에선 어죽이나 민물매운탕이지’ 하며 봐 둔 식당에 도착하니 여섯 시 반까지 한단다. 엥? 점심 장사만 하려거든 서너 시에 닫든지, 저녁 장사를 하려거든 더 하든지. 이래서야 누가 일 마치고 올 수 있을까?
그런데 들어와 앉으라고 해놓고선 “일찍 와야지”라며 타박하는데, 몇 번이나 계속하니 좀 싫다. 말하기에 굶주린 할머니표 잔소리도 아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그냥 가라고 했으면 다른 식당도 많건만···’ 민물고기를 갈아 끓인 생선국밥은 참 맛있었다. 덕분에 기분이 풀리고, 속없이 ‘내일 낮에 와서 다른 것도 먹어볼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역시 이쪽에서는 민물고기를 먹어야 한다.
인기 많다는 빵집에 들러 빵을 사서 나오다가 초등 1학년생이 크레파스로 그린 것 같은 원더우먼 그림을 스카치테이프로 붙여놨길래 누구 작품이냐고 물어봤다. 아들이나 조카가 그린 거라고 하면 “와!”하며 놀라주려고 물어본 건데, 돈 주고 사 왔단다! 할 말이 없어서 그냥 나왔다.
편의점에서 군것질거리도 샀다. 비닐봉지가 150원이다. 봉지 가격에 대해 주인과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다가 내가 “이거 제작 원가는 1원도 안 할 텐데” 했더니, 아니란다. 자기네는 100원에 들여온단다. 내가 다시 “아니요, '제작' 원가요. 공장에서 나오는···” 그랬더니 더 강경하게 부정하며 100원에 사 온단다. 계속 얘기하면 그가 화내거나 다툼이 될 것 같았다.
아내가 시내에 김밥집이 유독 많이 보인다고 한다. “그래?” 하는 순간 내 눈에도 김밥집이 들어온다. 그런데 김밥세상, 김약국, 김내과가 나란히 붙어있다. 3김 시대로군! 여행하면 이런 것마저 재미있다. 90분 만에 제법 많은 에피소드가 생긴 곳, 느린듯하면서도 정겹고 활력 있고 감성 느껴지는 옥천이었다.
충북 영동, 여행 느낌이 색다르군
오전에 포도로 유명한 고장 영동으로 왔다. 영국사라는 절에 들렀다. 큰길에서 좁은 산길로 한참 올라와야 하는데도 사람이 많았다. 절에는 천 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밑에서는 크기가 어림 되지 않아 만세루에 앉아 내려다보는데, 눈보다 아래쪽에 있는데도 앞산을 다 가릴 만큼 크다. 천 살인데도 정정하시다. 노랗게 단풍 든 모습이 장관이라는데, 역시 아직은 샛노랗지 않다.

조용하고 고즈넉한 절이다. 대웅전도, 그 옆 극락보전도 아담하다. 작고 평범한 절인가? 아니다. 통일신라시대에 지어졌고, 고려시대 원각국사가 머물며 중건했다고 한다. 원각국사비도 보물, 대웅전 앞 삼층 석탑도 보물, 아주 보배로운 절 같다. 다른 계절에 다시 와서 절 뒤 천태산에 올라봐야겠다.
읍내로 와서 미리 검색한 백가네 식당에서 메기매운탕을 먹었다. 커다란 냄비에 크고 살이 단단한 메기 두 마리가 담겨 있는데 보리새우가 들어간 국물이 담백하면서 진하면서 달콤하다. 최고다! 다음에 또 오고 싶다. 둘이 배불리 먹고 4만원이라니, 아무리 민물고기가 흔한 곳이라지만 정말 예전 물가다. 이런 게 지방 여행의 묘미다.
아내가 “이런 건 서울에선 6만~7만원 받아도 되겠다”라고 한다. 하지만 서울로 오면 맛도 분위기도 변하지 않을까? 서울의 수많은 ‘전주식당’, ‘부산횟집’도 그런 기상을 품고 왔겠지만 결국 고향의 맛과 멀어진다. 일에 지친 서울 사람들은 아무거나 잘 먹는다. 소비자의 정교한 입맛과 냉정한 평가가 없으면 주방은 금방 제맛을 잃는다.
황간의 월류봉 둘레길을 걷기로 했다. 초입부터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 이런 곳을 지금껏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니. 어느 50대 남자가 땅콩과 호두를 판다. 어쩌면 말투와 표정이 이렇게 순박할까. 제값 받고 좋은 물건 팔면서도 미안해하는 느낌이다.
만원 주고 볶은 땅콩을 한 봉지 사서 한 알씩 까먹으며 걷는다. 커피를 손에 든 아내에게 하나씩 까 건네주는 게 좀 귀찮지만, 그래도 둘레길 풍경과 분위기가 나를 인자롭게 해준다.

1코스 여울소리길은 왕복 5.4km, 딱 걷기 좋은 정도다. 고요한 강 옆으로 놓인 나무 데크, 오솔길, 잔도가 조화롭고 오르막과 내리막도 재미있다. 다람쥐와 딱따구리를 보았다.
주차장에 돌아오니 이번에는 어느 부인이 포도를 판다. 커다란 샤인머스캣 세 송이 한 상자에 만원. 유쾌한 대화 속에 한 상자 샀다. 이런 쇼핑은 여행의 맛을 높여준다.
1박 2일로 계획했던 여행이 2박 3일이 되었는데도 다소 아쉽다. 역시 가을에는 어디든 떠나야 한다. 돌아오는 길에 또다시 여행 떠나고 싶어지니, 아, 가을 여행 참 좋다.
여성경제신문 박헌정 작가 portugal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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