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자본주의를 둘러싼 최근의 혼란을 기술적 사건으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비트코인을 중심으로 한 암호화폐 생태계는 기축통화 기반의 스테이블 코인의 등장 이후 비잔티움과 바벨이라는 두 신화적 균열을 동시에 겪고 있다. 하나는 의사전달의 불신이요, 다른 하나는 언어적 기반의 붕괴다. 기술은 여전히 작동하지만, 그 위에 얹힌 의미는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비트코인은 최근 ‘대체자산’의 상징에서 ‘고위험 포트폴리오’의 대표 종목으로 급격히 전락했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현금 살포 발언이나 미 의회의 예산안 합의 기대감 같은 단기 재료에
금융사고가 반복되는 동안 성과급은 오히려 커졌다. 내부통제 부실로 인한 손실이 수천억 단위로 발생해도, 임직원 보수 체계는 단기 성과 중심으로 작동했다. 금융당국이 다시 클로백(보수환수제도) 도입에 나선 이유다.클로백(clawback)은 임직원이 내부통제 실패나 부실한 의사결정으로 회사에 손실을 입혔을 때, 이미 지급된 성과급을 다시 거둬들이는 제도다. ‘발톱으로 움켜잡아 되찾는다’는 뜻에서 유래했으며 2000년대 초 미국 엔론(Enron) 사태 이후 경영진의 도덕적 해이를 막기 위한 장치로 주목받았다. 제도가 본격적으로 법제화되고
주식시장에 인공지능(AI)이 들어온다는 말은 오래됐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이들이 “AI가 사람을 대신해 분석해주겠지” 정도로만 상상한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사람을 대체하는 것을 넘어 자본시장의 구조 자체가 바뀐다. 인간의 언어로 쓰이던 막연한 보고서가 '로그'와 '검증'으로 대체된다는 얘기다.지난 4일 한국거래소가 개최한 '2025 건전증시 포럼'만 봐도 국내 금융권은 “자본시장에 AI라는 뇌를 단다”는 구호에 취해 있다. 거래소는 AI 전환을 외치고, 학계는 초개인화 금융을 약속하며, 증권사는 AI 파트너십 성과를 과장한다
대형마트 업계가 올해 3·4분기에도 고전하는 분위기다. 장기 불황이 지속되면서 소비심리가 얼어붙은 데다 온라인 중심으로 재편된 유통 환경에서 제도적 제약까지 겹치며 ‘이중고’를 겪고 있다.올 들어 주요 대형마트 3사의 실적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온라인으로 상품을 구매하는 소비자들이 늘면서 기존 마트 매출은 역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산업통상부가 지난달 29일 발표한 ‘9월 주요 유통업체 매출 동향’에 따르면 올해 3분기 대형마트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10.2% 감소했다. 8월(-15.6%)과 9월(-11.7%)의 부진이 누적되면
새벽배송은 속도의 문화를 꽃피웠다. 도시는 밤사이 움직였고, 잠든 사이 물류는 날아다녔다. 그러나 속도는 곧 부채였다. 과로사 통계가 쌓이면서 ‘더 빠르게’는 ‘더 버티기’로 변했다.기계도 시스템 냉각 없이 연속 작동할 때 구조적 과열이 발생한다. 물리학에서는 이를 열역학적 비평형 상태라 부른다. 엔트로피는 축적되고 시스템은 결국 붕괴한다.민주노총이 제안한 심야배송 제한 논의는 규제라기보다 과열 구간을 식히는 ‘시간 레이어링(temporal layering)’에 가깝다. 자정부터 새벽 5시까지 시스템은 쉬고 사람은 회복한다. 파장을
'귀찮아병원'에서 이상지질혈증 처방을 받은 김비만 씨. 나쁜 콜레스테롤 수치가 평균 이상이었다. 며칠 전 가슴 통증을 느꼈던 게 생각난 비만 씨는 옆동네 '또와봐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아보기로 한다.3교대 근무를 하는 비만 씨는 일정이 바쁘다 보니 하루 안에 진료를 끝내기로 했다. 그런데 '또와봐병원' 원장은 "'귀찮아병원'에서 받은 진단증을 가져와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 병원에서 피 검사를 다시 해야 한다"고 했다. 비만 씨는 "병원들 다 가지고 있는 기록인데 전화해서 달라고 하면 안되냐"고 물었지만 벽에 대고 떠드는 격이었다.
은행 앱을 따로 열지 않아도 돈을 보내고, 상품 구매나 생활 활동의 맥락 속에서 대출과 보험에 가입할 수 있다. 이제 금융은 별도의 채널을 거치지 않고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비금융 서비스 안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와 있다. 이른바 '임베디드 금융(Embedded Finance)'이다.한국은 이 변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나라 중 하나다. 스마트폰이 지갑을 대신한 지 오래고 네이버·카카오·토스 같은 플랫폼은 생활의 대부분을 연결하고 있다. 금융은 더 이상 독립된 영역이 아니다. 생활 속 플랫폼에 흡수돼 ‘어느 은행을 이용하느냐’보다 ‘어떤
중국 선지는 2009년에, 일본 화지는 2014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했다. 그러나 15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 한지는 여전히 문턱을 넘지 못했다.한지(韓紙)는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문화 유산 중 하나로 닥나무 껍질인 인피섬유를 원료로 제조한 우리 고유의 종이다. 이런 한지는 우리 문화 곳곳에 사용됐다. 방문과 창문을 바르던 창호지에도 한지를 사용했고 아기를 낳으면 처마 밑에 새끼줄로 치는 금줄에도 한지 조각을 끼워놓았다.그러나 오늘날 이런 한지는 일상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필자의 기억에도 한지를 접한 건 학창 시절
오픈AI가 한국 정부에 제출한 ‘AI 블루포인트 보고서’의 핵심은 자립이 아니라 기준 통합이다. 외면적으로는 ‘듀얼 트랙’을 제시했지만, 구조는 단일 방향으로 고정됐다. 글로벌 프런티어 지위를 인정하고, 파운데이션 모델 포기를 권유하는 기술 문서였다.23일 빅테크 업계와 엔지니어들에 따르면, 오픈AI가 공개한 ‘AI in South Korea: Economic Blueprint’는 듀얼 트랙 협력 모델을 제시했다. 그러나 보고서의 청사진은 자립보다는 기준의 일원화에 가까웠다. “독립은 비효율이며, 통합이 곧 생존”이라는 메시지가 깔
미국이 만든 글로벌 공급망이 이제 미국을 흔들고 있다. 값싼 생산을 중국에 맡기고 소비를 책임졌던 구조가 한계에 다다랐다. 제조업은 약해졌고 무역적자와 부채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불어났다. 트럼프의 복귀는 이 균열이 표면으로 드러난 결과다. 시장은 금리나 관세보다 그가 말하는 ‘미국 재건’에 집중한다. 표면은 보호무역이지만 핵심은 해외로 빠져나간 생산 기반을 되찾는 일이다. 부채에 기댄 성장 방식을 바꾸려는 시도이기도 하다.미국의 위기 인식은 내부에서부터 출발한다. 글로벌 경제의 지배국으로 군림해온 지난 80년 동안 미국은 막
얼마 전 AI 관련 논란으로 인터넷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번 사건의 시발점은 한 언론 보도였다. 지난 9월 30일 서울교통공사가 본격적인 투병에 들어가며 활동을 쉬기로 한 강희선 성우(여·65)의 목소리를 AI에 학습해 활용할 것이라는 소식이 보도됐다.강씨는 1979년부터 활동한 베테랑으로 '짱구는 못말려' 속 짱구 엄마 봉미선의 목소리로 유명하다. 그는 지난 29년 동안 서울 지하철 한국어 안내 방송도 담당해 왔다. 일에 대한 애정이 강했던 강씨는 2021년 대장암 진단을 받고 항암 치료를 하면서도 녹음을 이어왔다.그러나 얼마
정부가 대미 협상에서 내세운 ‘3500억 달러 투자 카드’는 이미 한계에 봉착했다. 지켜지지 못한 약속은 정치적 수사에 불과할 뿐 국제 금융시장에서 신뢰할 만한 방패가 되지 못한다. 향후 5년간 2400억 달러 투자 및 현지 공채 계획까지 발표한 현대자동차가 그 증거다. 한화오션, HD현대, 삼성중공업이 뛰어든 마스가(MASGA) 프로젝트도 정부의 궤도를 이탈했다.이재명 대통령이 22일 로이터 인터뷰에서 “통화스와프 없이 트럼프 대통령이 요구하는 방식대로 3500억 달러를 현금으로 인출해 투자한다면 한국은 금융위기 상황에 직면할 것
'선 넘지 마라'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말이다. '선'이란 개념은 모호하지만 대체로 누구나 마땅히 지키는 규범의 의미로 쓰인다. 이는 정치에도 적용할 수 있다. 12.3 불법 계엄 사태가 발생한 지 벌써 9개월이 지났다. 정치권이 반복해서 '선'을 넘어선 끝에 '헌법'이라는 최후의 기준마저 넘어선 순간이 12.3 불법 계엄이었다.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선'이란 무엇일까?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저서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민주주의를 지켜온 보이지 않는 규범으로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
“AI 구독료가 한 달에 3만원이라는데 아이가 둘이면 6만원이 고정으로 빠집니다. 생활비에 대출이자까지 감당하는 집엔 결코 가벼운 돈이 아니에요.”인공지능(AI) 서비스는 이미 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왔다. 학습, 금융, 의료 상담까지 몇 번의 클릭으로 접근할 수 있다. 구독료가 크지 않아 보이지만 다자녀 가구나 저소득층에는 분명한 장벽이다. 정부는 AI를 성장의 씨앗으로 내세우며 내년 관련 예산을 10조원 이상으로 늘렸지만 이런 사각지대를 메울 로드맵은 찾아보기 어렵다.정부가 발표한 2026년 예산안은 총지출 728조원에 달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보여준 외교는 '칭찬'과 '무난'이었다. 미국은 전통적인 동맹이자 우호국이기 때문에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건 양국관계의 안정에 도움이 된다.하지만 미국의 통상·안보 압박에 맞선 절체절명의 시기에 이 대통령이 보여준 모습은 적절한지 의문이 남는다. 진정으로 국익을 우선시하는 대통령이었다면 더 당당한 자세를 취했을 것이다.이 대통령은 순방길 기내간담회를 통해 트럼프 대통령의 저서 '거래의 기술'을 읽어봤다며 그가 어떤 방식으로 협상을 하는지 다 알고 있다고 자신만만했다.트럼프의 협상 기술은
한국계 중국인 포함, 중국 국적인이 국내 돌봄 시장을 휘젓고 있다. 정부가 간병비 급여화를 밀어붙이고 동시에 외국인의 요양보호사·간병 분야 취업 경로(E-7 비자 등)를 넓히는 두 축이 맞물리는 지금 한국의 돌봄 현장은 ‘외주화’의 가속페달을 밟고 있다. 건보공단·학계에선 적용 범위에 간병비 급여화는 연 3.6조~15조의 추가 재정이 필요하다는 추계가 나온다. 병원 중심의 간호·간병통합서비스(‘보호자 없는 병원’)도 확대 기조다. 방향은 분명하다. 간병비의 공적 부담 확대다. 문제는 속도와 설계다.올해 1월부터 노인요양시설 요양보호
"왜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세요?". 장기 요양기관 현지 조사권을 거머쥔 공무원이 요양시설 원장에게 비수를 꽂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원장이 현지 조사 당시 억울했던 이야기를 기자에게 쏟아냈기 때문이다. 기자는 담당 공무원 취재를 진행했고 공무원은 곧바로 원장에게 쏘아댔다. 중립을 지켜야 하는 공무원이 기본에 충실하지 못한 사례다. 강원도의 한 지방 공무원은 70대 요양시설 원장을 무릎 꿇게 했다. "문 닫고 싶어요?" 요양기관을 대상으로 한 현지 조사권을 거머쥔 일명 '낡은' 공무원이 대한민국 노인 복지를 망치고 있다. “이 정도
은행이 ‘손쉬운’ 대출에만 몰린다는 지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부동산 담보 대출은 계속 늘고 있지만 기업 투자 자금은 뚜렷한 증가세를 보이지 않는다. 최근 자산 운용 흐름을 봐도 이자이익 중심의 전략 아래 주택담보대출 쏠림이 뚜렷하다. 가계대출 증가분 대부분이 주담대에서 발생했고 전체 가계대출 중 주담대 비중도 크게 높아졌다. 반면 중소기업 대출은 증가 폭이 미미하고 연체율도 주담대보다 3배가량 높다.은행 입장에서 ‘수익이 나고 리스크가 낮은’ 곳에 자금이 몰리는 건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담보가 확실한 주택대출은 자본을 적게 소
"정부와 교육기관, 의료계는 이번 사안을 감정적 여론이 아닌 명확한 원칙과 공정성에 입각하여 처리해 주시길 간곡히 요청 드립니다. 국민의 신뢰는 하루아침에 쌓이지 않으며 단 한 번의 특혜로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지난 12일 노00 씨가 국회전자청원에 등록한 '의대생·전공의에 대한 복귀 특혜 부여 반대에 관한 청원'에 있는 내용이다. 청원은 지난 17일 동의를 받기 시작해 6일 만에 5만명을 돌파,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로 부쳐졌다.그러나 정부가 25일 장기 휴학 의대생에 대한 복귀 방안을 확정하면서 해당 청원은 힘을 잃었다.교육부
“실시간 카메라 설치, 4년제 졸업 이상, 30분 단위로 상황 보고.”한 베이비시터 모집 공고에 걸린 조건이다. 아이를 돌보는 데 요구되는 조건이 이렇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인데 아무에게나 맡길 수 있겠느냐는 말 이해는 된다. 맞벌이 시대, 부모는 아이를 믿고 맡기기 위해 CCTV를 달고 자격증 유무까지 세밀히 따진다. 오죽하면 ‘시터 출신 학부모가 경쟁력’이란 말까지 나올까.그런데 내 아이는 그렇게 지켜보면서 부모는 왜 무자격자에게 맡겨야 하나. 그리고 그 무자격자에게 국민의 건강보험료를 왜 써야 하나.정은경 보건복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