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회로 예정하고 연재해 왔던 ‘단독주택 인문학’이 이번 글로 마무리된다. 격주로 쓰는 글이지만 늘 마감에 쫓기다시피 쓰게 되어 부실한 내용이 되었으니 독자들께 송구한 마음이다.단독주택을 오래 설계하면서 내가 작업한 집에서 건축주 식구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가끔 집을 방문하기도 하고 건축주와 통화하면서 사는 얘기를 듣고 있다. 좋은 집에 살게 해 줘서 고맙다는 얘길 전해 들으며 행복은 집에서만 이루어진다고 믿는 소신이 틀리지 않는다는 걸 확신하게 된다. ‘단독주택 인문학’이라는 내용으로 연재 글을 쓰게 되었던 건 단독주택
일인가구가 늘어나는 추세가 점점 가속화되고 있다. 전체 가구 수에서 일인가구는 2030년에는 35%를 넘어서고 2050년이 되면 40%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건 우리네 삶이 행복에서 멀어지는 정황이 아닐까 싶다. 개인적인 인간관계가 옅어지고 있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가족과 살지 못하고 혼자 지내야 하는 건 익숙해지기 어려운 일이다. 부부끼리 살아도 외로운 건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어 독립해 나가면 부부는 각방을 쓰는 게 요즘의 추세가 되고 있다. 남편과 아내가 방을 따로 쓰게 되
며칠 전 건축박람회를 다녀오면서 건축사가 해야 할 일이 얼마나 있을까 싶은 암울한 느낌이 밀려왔다. 부산이라는 지역의 한계로 참여 업체는 많지 않았는데 유독 눈에 띄는 부스는 단독주택 전문 시공회사였다. 업체는 세 군데였지만 화려하게 꾸며진 부스는 관람객의 시선을 끌 만했다. 다양한 외관을 가진 단독주택 투시도와 도면으로 대형 화면을 만들어 부스를 구성하고 있었다. 수십 채의 평면도와 외관을 보고 고르면 되니까 건축사를 찾아 번거로운 설계 과정 없이 진행하면 편하겠다고 생각할 수 있다. 집을 지어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혀를 내두르며
아파트는 기성품이어서 지어주는 대로 살아야 한다. 집은 삶을 담는 그릇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파트라는 그릇에 맞추어 살게 되는 건 어떤 삶일까? 아파트는 씻고 자는 정도의 숙소 이외의 기능만 담는 그릇이라고 하면 과언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건 아니라고 반문한다면 다른 기능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단독주택은 맞춤 집이니 건축주가 살고 싶은 대로 설계해서 지을 수 있다. 도시에서는 땅값도 비싸고 단독주택이 모여 있는 마을이 없으니 집터를 구하는 일부터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상가주택을 지을 수 있는
아~~ 대한민국 우리나라는 아파트 공화국이다. 아파트가 아닌 단독주택은 오래된 동네에 있을 뿐 새로 지은 집을 찾아보는 게 쉽지 않다. 아무리 아파트에 사는 게 싫어서 단독주택을 지어서 살고 싶어도 땅값도 이만저만 비싼 게 아닌 데다 이웃해서 지낼 집이 없는 것도 문제다. 진정 도심지에 단독주택을 지어 살 수 있는 방도는 없는 것일까?근래에 설계했던 단독주택 작업은 모두 상가주택이다. 한 채는 일 층에 건축주의 사업장이 들어가고 이 층과 삼 층을 가족들의 보금자리로 지었다. 또 다른 한 채는 일 층에 근린생활시설, 이 층에는 다가구
아파트에 살면 할 수 없는 생활을 단독주택에서는 일상에서 누릴 수 있어야 집을 짓고 살 명분이 된다. 아파트에는 없지만 단독주택은 마당이 있다고 하는 건 그런 명분으로 부족하다. 한여름에 잡초를 뽑느라 땀 좀 흘려본 사람은 마당 자랑을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마당 관리 때문에 단독주택을 짓고 사는 걸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역설적으로 마당에서 누릴 수 있는 게 많을수록 단독주택을 지은 보람과 함께 하루하루 지내는 일상이 즐거울 것이다. 부부가 도심을 벗어나 단독주택에서 살면서 마당에서 누릴 즐거움이 없으면 후회할 시간은 금방
단독주택을 설계하다 보면 부부가 집에 관한 생각이 달라 서로 다른 입장을 내세우며 대립하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 부부 중 한 사람이 집 짓기를 주도하기 마련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설계 작업이 제대로 진척되지 못하게 된다. 집에 대한 견해 차이를 보이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으나 한 사람은 모양새가 예쁜 집, 다른 한 사람은 쓰임새가 좋은 집을 주장하게 되면 합의점을 찾는 건 요원하다. 사실 단독주택은 부부 두 사람만 산다고 해서 그들만 만족하면 될 일이 아니다. 집이 지어지고 나면 허물어질 때까지 누가 살아도 좋은 집이라야 하기 때
‘우리집’에서 식구들과 마주 앉아 된장찌개 보글보글 끓여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저녁밥을 먹는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소확행이라 했던가. 따스한 햇살, 창밖으로 내리는 비, 산들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불어오는 집에서 누리는 소소한 일상이 행복이 아니면 무엇이랴. 비 오는 날이면 처마 아래로 떨어지는 낙숫물을 바라보며 소리를 듣는 것도 단독주택에서 사는 즐거움이다. 처마 아래 공간이 있으면 비나 여름 햇볕은 단호하게 그어주고, 바람과 겨울 햇살은 기꺼이 들이면서 집 안의 일상이 쾌적하게 유지된다. 처마가 있어야 비 오는 날에 빗물이 외
“건축적 지식이나 기획력, 전문 기술만으로는 집을 설계할 수 없다. 건축가는 삶에 대한 풍부한 상상력과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설득력과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의 행동이나 동작을 자세히 관찰하고 복잡한 심리의 줄거리를 읽어내어 해석하고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희로애락에 공감할 수 있는 유연한 마음을 가진 인간 관찰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 를 집필한 나카무라 요시후미 주택을 설계하는 일이 건축가들에게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이유는 오직 사람의, 사람에 대한, 사람을 위한 집이어야
전원주택을 일러 ‘풀하우스’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POOL HOUSE가 아니라 잡초-풀과 함께 살아야 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잘 깎아진 잔디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을 사진으로 보고 환상을 현실로 옮겨서 집을 지은 결과를 빗댄 말인 것이다. 넓은 잔디 마당을 꿈꾸며 집을 지었다면 집은 곧 주체하기 어려운 짐이 되고 만다.단독주택을 설계할 때 건물과 마당의 관계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즐거울 수 없게 된다. 내가 살고 싶은 집을 지으려고 한다면 건물 설계만큼 마당 설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집이 아니라 짐이 되고,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게 되면 몸 상태를 온전하게 유지할 수 없다. 나갔던 숨이 들어오지 않거나 들어왔던 숨이 나가지 못하면 목숨을 잃는 순간이 된다. 목숨은 국어사전에 ‘사람이나 동물이 숨을 쉬며 살아 있는 힘’이라고 되어 있다. 사망 원인에서 가장 많은 게 폐질환이라고 하니 숨을 잘 쉬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들숨, 날숨을 살피는 수행이 명상이고 참선이라 한다. 들어오는 숨이 단전까지 닿는지 살피고, 나가는 숨은 속을 완전하게 비우듯 내보내며 바라보듯 뱉어낸다. 짧은 숨을 헐떡이듯 쉬거나 숨 쉬는 상태를 의식하지 못
우리 몸은 음양의 균형이 조화롭게 이루어져야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한다. 음식을 잘 먹는 건 음을 채우는 것이고, 운동으로 양기가 활발해져야 몸은 음양의 조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음식을 잘 먹어도 운동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건강을 유지하기 어렵고, 제대로 챙겨 먹지 않으면서 과하게 몸을 써도 안 된다. 먹는 만큼 운동이 필요하고, 몸을 많이 쓰는 일을 하려면 잘 챙겨 먹어야 음양의 조화를 맞출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집도 내부 공간은 음의 요소로 정적이고, 외부 공간은 양의 요소라 동적이다. 발코니가 없는 신축 아파트나 오피스텔에
집에서 창(窓)은 어떤 존재이며 그 역할은 어떠한지 생각해 보자. 집 안에서의 창은 생활환경을 쾌적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환기, 채광, 일조, 조망의 목적을 가진다. 집 밖에서 보이는 창은 아름다운 외관을 디자인하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된다. 건축물의 창은 사람 얼굴로 보자면 눈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눈이 작은 사람보다 큰 눈을 가진 사람이 더 돋보이니 집에서 창도 기능보다 외관을 꾸미는 디자인 요소로 더 비중을 두게 된다. 집을 설계하면서 창을 어떻게 내야 하는지의 우선순위는 당연히 기능적인 부분이 되어야 한다.
일본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놀라는 일 중 하나가 욕실에 변기가 있는 것이라고 한다. 욕실 안에 변기를 두는 게 놀랄 일이라고? 우리에게는 아무런 일이 아니지만 일본 사람들은 거의 변기는 욕실과 별도로 쓰고 있다. 그건 욕실을 쓰는 주거 문화의 차이일 뿐이니 그 반응에 응답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그런데 집집마다 안방에 디럭스한 욕실을 따로 두는 건 우리나라 집에만 있지 않나 싶다. 한 집에 식구가 많지도 않은데 굳이 욕실을 안방에 따로 있는 게 의아하지 않은가? 부부가 각방을 쓰게 되면 한 사람은 욕실까지 부설된 안방, 다른 한쪽
아이들의 아버지이자 아내의 남편인 한 남자, 이제는 가장이라는 직함(?)은 쓰지도 못하는 그가 쓸 ‘남자의 공간’은 ‘우리집’ 어디에 있을까? 아마도 ‘거실의 소파’이겠지만 혹시 방 하나를 서재로 쓰고 있는 남자가 있는지 궁금하다. 조선시대 옛집에는 사랑채가 당당한 남편의 영역이었다. 사랑채에서 드나드는 손님과 교유하며 집에 있어도 바깥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아내는 어원이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데 옛집에서는 안채의 주인이었다. 옛집과 요즘 아파트를 비교해 보면 사랑채는 사라지고 안채만 남아있는 것 같다
모 프로야구 구단이 승승장구할 때 ‘기세’라는 구호를 썼다. 기세(氣勢)란 기운차게 뻗치는 운세를 말하는데 집의 운세가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뻗치듯이 좋은 집의 기운을 받으며 살 수 있다면 무엇을 하더라도 저절로 잘 풀리지 않을까 싶다. 그런 일상이 담긴 집이라면 소위 풍수에서 말하는 명당에 사는 것이지 않을까 싶다. 유독 활달한 아이들을 보면 화목한 가정, 자애로운 부모의 슬하에서 자라고 있을 것이다. 그 아이의 배경, 믿을만한 뒷배는 집이고 부모라는 건 분명하다. 화목한 가정을 한 장의 사진이나 그림으로 본다면 식구들이 밥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이 문구는 저 유명한 성철 스님의 법구(法句)이다. 어쩌면 당연한 말이지만 스님이 던지는 화두를 잘 새겨보면 산을 산으로, 물을 물로 보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게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그럼 우리는 집을 '집'으로, 방을 '방'으로 제대로 쓰면서 살고 있는지 돌아보자. '집이란 무엇일까?'라고 화두를 들어보면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 이갑수 산문집 에는 집이란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지는 곳’이라 정의를 내리고 있다. 집은 밖에 있다가 들어오는 곳이 아니라 잠시 밖으로 나갔다가 볼 일
우리집을 지어서 살아보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독주택을 짓는 목적이라고 해도 되겠다. 아파트에서는 할 수 없는 일상생활을 단독주택을 지어서 누리기 위함이라고 하면 어떨까 싶다. 지금은 누구나 아파트에서 살고 있지만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따로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한마디로 얘기하면 잠만 자고 나오는 숙소 이상 다른 일을 하는 집이 있는지 모르겠다. 아침밥도 먹지 못하고 집을 나와 밤이 되면 잠잘 시간에 맞춰 들어가지 않는가? 휴일이면 집에 하루 종일 있다고 해도 TV를 보는 일 말고는 따로 할 일이 없다. 모처럼
집터를 확정했고 설계자인 건축사도 정해졌으면 집 짓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다. 집터는 법적 건축 용어로 집을 지을 수 있는 땅이라는 의미로 대지(垈地)라고 한다. 건축 설계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대지에 건물을 놓는 배치 작업이 될 것이다. 물론 이 작업은 건축사가 알아서 잘하겠지만 건물을 어떻게 놓느냐에 따라 집을 쓰는 효용성이 크게 달라지므로 건축주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집 짓기에서 필요한 전문가는 건축설계와 감리, 행정 업무는 건축사가 되고 공사는 시공자가 된다. 여기서 집 짓기를 전문가가 보는 관점과 집을 쓰게 될
다른 경기도 상황이 녹록지 않겠지만 건축 경기는 얼어붙어서 풀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건축 경기가 이런 상태인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특히 금융 환경이 좋지 않아서 그럴 것이다. 단독주택만 해도 은행 융자를 받지 않고 짓는 사람이 드물다. 그런데 금리 등 대출 조건이 돈을 빌릴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한다. 그런데 경기가 풀려 집을 지을 수 있는 자금 계획을 짤 수 있게 되면 설계를 서두르게 된다. 어떤 건축주는 설계 계약을 하면서 건축허가를 언제까지 받을 수 있느냐고 묻기도 한다. 아이를 가지지도 않았는데 출산 계획을 잡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