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막염으로 병원에 입원하셨던 앞집 아저씨가 퇴원하셨다.문안 인사 겸 들어서니 아저씨는 마당 한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아서 해 바라기를 하고 있다. 아직 회복이 덜 되어서 그런지 늘 큰소리치던 그분의 표정이 뭐랄까, 어릴 적 부모에게 된통 혼난 표정처럼 겸연쩍다.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키며 눈을 찡긋하신다. 마당 한쪽에 팽개쳐진 고추 지지대가 왜?문득 아버지가 생각났다. 내 나이 40대 가장 바쁜 시절에도 틈만 나면 친정에 들러 아버지를 뵙고 오곤 했다. 그때도 지금도 변함없이 나에겐 우주이신 나의 아버지는 살갑기는커녕 말씀
대학을 갓 졸업한 지인의 딸이 취업하더니 청년주택도 당첨되었다. 엄마 눈엔 아직 어린데, 딸이 내민 청사진이 너무 기특하여 힘을 보태기로 했단다. 딸의 이삿짐을 실어다 주고 돌아온 단아하던 지인의 얼굴이 어둡고 홀쭉해졌다. 부모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조잘대던 딸의 수다가 너무 밉고 섭섭했다며 그날의 상황을 전하는데 미리 겪은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이젠 친구랑 밤거리를 돌아다녀도 보고, 기타도 배우고, 지겨운 집밥 대신 맛집도 찾아다니고 이것저것··· 할 것이 태산이라며 흥분해 떠들었다. 짐을 정리해 주고 돌아오는데 딸이 배웅
잠자리에 누웠는데 모르는 번호가 집요하게 울렸다. 늦은 밤이라 망설이다가 받으니 마을 안쪽 골짜기에 사는 분이다.“이거 참, 마누라가 초저녁부터 전화를 안 받아서요. 그 여자가 지병이 있어서 혼자 두면 위험한 사람이라···.”부인과는 몇 시간째 연락이 안 되고, 본인은 멀리 나와 있고, 이건 틀림없이 쓰러진 거라며 어쩔 수 없이 마을 일 맡고 있는 나에게 전화한 거다.그분들은 도시에서 살다가 15년 전 고향으로 귀촌하셨다. 시골 정서와는 달리 조용하고 서로에게 어찌나 정다운지 잉꼬부부로 소문나 있다. 동네에서 유일하게 내 글을 읽어
오늘도 여지없이 아침부터 푹푹 찐다. 나는 주 3일 근무 후 남는 시간 중 화요일은 거의 종일 복지관에서 산다. 이곳은 여가 활동공간과 품격을 더하는 온갖 무료 학습, 그리고 저렴하게 제공하는 복지식당도 있다.오전에 수업 한 개 듣고 점심을 먹고 오후에 또 한 수업 들은 후 두 시간 정도 독서를 하다가 6시에 귀가하는 루틴이다. 어떤 이는 노인네 유령 놀이라고 폄하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일수 도장 찍듯이, 참새 방앗간 출근하듯이, 가방을 둘러메고 집을 나선다. 아무튼 바쁜 아침이다.오전 첫 수업은 10시인데 나는 9시 전에 집을 나
시골 동네를 도는 마을버스를 타면 버스 안은 늘 소란스럽다. 누군가가 올라타면 서너 명은 아는 사람이라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는다. 한 정거장에 차가 멈추고, 검붉은색 가죽 앞치마에 워커를 신고 카키색 모자를 눌러쓴 중년의 여인이 올라온다. 눈에 확 띄는 복장이 힘이 있다.한 어르신이 아는 체 한다.“어딜 다녀오는가? 자네 그 복장은 랜도마크여. 랜도마크~(랜드마크)”아마도 일을 할 때나 구역 내에 외출할 때는 늘 그렇게 입고 다니나 보다.“자네 식당은 내 부모님 대부터 단골이니 벌써 몇 년째인가?”옆에 어른도 거든다.“암만~ 저번
젊은이들을 만날 기회가 주어졌다. 면 단위 시골 마을의 든든한 이웃사촌이 되고 지역에 생기를 더하며 청년창업의 문을 연 귀한 청년들이다. 비 온 후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5월의 싱그러움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가슴까지 설레었다.우리는 그들에게 모범답안보다, 클리셰 범벅의 뻔한 기승전결보다 형식이나 절차, 시간 등의 제약 없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다행히 이웃집 아줌마와의 수다 같은 인터뷰는 역시 젊은이들의 솔직한 속내를 들어보는 데 적잖은 도움을 주었다.그들은 내 아들이고 딸이었다. 내 아이들의 현실적인 고민과 넘어가야 할
봄꽃은 투정하는 사춘기 아이처럼 홀짝 폈다가 삐친 듯 금세 시들어 버린다. 올해는 대형 산불에 혼이 나가 마당을 소홀히 한 것도 이유가 되겠다.이전에 살던 곳에서 물난리를 크게 겪은 적이 있다. 이보다 더 처참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재난에 등급은 없는 것 같다. 인재로 시작되었지만 미친 듯이 부는 바람이 키운 시뻘건 불 괴물이 연일 종잡을 수 없이 방향을 바꿔가며 산천을 집어삼키는 광경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다가 멍하니 생각이 멈추었다. 연이어 들려오는 집이며 농작물을 잃은 지인들의 피해 소식에 자꾸 허방을 짚는 듯 기운이 달리고
울타리에 심어놓은 개나리꽃 봉오리가 터질 듯 물이 올랐다. 완연한 봄날이다. 얼마 전 친구와의 점심 약속이 있었다. 장소는 최근 개업한 안동댐 근처의 경양식집이다. 막 집을 나서려는데 지나가다 들렀다는 딸이 태워주겠단다.때마침 친구 역시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할 것 같으니 중간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쪽도 남편이 모처럼 기사를 자청했단다. 각자 차로 목적지에서 만나면 되는 간단한 계획이 이때부터 꼬이기 시작한다.“거기 있잖아. 아··· 갑자기 생각이 안 나네··· 거기.”“아. 그래···.”“권정생? 아닌가? 암튼 권 선생이야, 거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오후 네 시, 아파트 입구 노랑 버스 전용 터미널에 부모들이 모여 서성인다. 온갖 버스가 차례차례 들어와 아이들을 내려놓고 떠나기를 반복한다. 토끼같이 엄마 품으로 달려드는 아이들이 참 예쁘다.젊은 엄마들이 빠지고 난 다섯 시 즈음, 이번엔 중년의 어른들이 서성거린다. 그 틈에 젊은 여성 두 명도 끼여 소곤소곤 대화를 나눈다. 혜진(가명)과 선영(가명)은 3년 전에 이 아파트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다. 두 여인은 할머니와 같이 살며 야간대학에서 복지사 공부도 함께 하고 있다. 혜진은 외향적이라 명랑하고 수다스럽
입춘도 지나고 우수도 지났다. 곧이어 경칩이 올 텐데 이상기온으로 너무 추우니 생물들이 잠에서 깨어나기나 하려나 걱정 아닌 걱정이 된다. 우수엔 언 눈이 녹고 비가 온다는데 올해는 눈이 많이 내렸다. 시설 농가엔 벌써 온갖 모종을 키우며 24시간 갓난아기 돌보듯 한다.“나는 3월이 오는 게 싫어요.”나의 투덜거림에 화답하는 동네 어른의 농담이 애잔하다.“하이고~ 심심풀이 농군 자네보다 전업 농군인 우리는 3월이 더 싫고 무서워.”마당 한쪽에 심어놓은 50여 그루 묘목에 이른 전지를 했다. 원래는 12월부터 2월 하순까지 차례대로 해
지난해 건강하시던 동네 어른이 귀갓길에서 쓰러져 돌아가셨다. 갑작스레 남편을 잃은 부인은 두 계절이 지나도 문밖을 안 나오신다. 나도 부부의 이별을 겪어 봐서 알기에 그 깊고 깊은 공허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나에겐 예정된 이별이었는데도 빈자리의 허전함과 허무가 나를 둘러싸고 시위를 하듯 했다. 종일 누워 자고 또 자도 잠이 오고 병명이 없는데도 온몸이 아팠다.그렇게 홀로서기에 허우적대던 어느 날, 남편이 꿈에 나타나 알려준 일터엔 나의 수호천사가 되어 주실 분이 계셨다. 꿈에서나 이루어질 좋은 일자리를 얻은 것도 감지덕지한데 그분은
“뱀의 해라 그런겨? 어째 시간이 뱀 지나가듯 가는구먼.”회관에 모여 노시던 한 어르신이 달력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하신다. 그러고 보니 나의 일상도 곶감 빼 먹듯 흔적 없이 지나간다.출근하여 마당을 돌아보는데 낙엽 사이로 잠자리 날개같이 투명한 뱀의 허물이 보인다. 어림잡아도 2m는 될 것 같은, 한 해에 한두 번은 실물로 만나는 구렁이의 허물이다. 내가 여기서 오래 일하는 이유가 어쩌면 남들이 기함하며 뒤로 나자빠질 뱀과 벌 같은 것들을 잘 처치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피식 웃는다.높은 산과 숲에 둘러싸여 유난히 곤충, 파
호주 사는 아들네의 방문으로 올해의 새해는 남다르다. 어느새 손주들의 엄마 아빠네, 친척집 초대에만 열흘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그들이 도착하기 전,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언니야, 조카네 안동 와서 먹을 음식은 뭐뭐 해놨어?”“음식? 뭔 음식? (김장김치 있고 아침용 소고깃국 끓여놨다만.)오후에 도착하면 저녁 배달시켜 먹고, 자고,다음날 가까운 온천 갔다가 외식하고,뒹굴다가 저녁 또 배달시켜 먹고, 자고,그다음 날부턴 즈들끼리 돌아다니라고 선물로 호텔 방 얻어 줬지렁.“내가 랩 하듯 말해주니 동생은 한숨을 쉬며 몇 년 만에 만나
도시에서 온 젊은 강사가 한 노인 회관에서 EM 미생물 만드는 설명을 한다.‘설탕 큰 한 스푼, 천일염 작은 한 스푼···.’그때 저 뒤에 계신 한 어른이 질문했다.‘선생님~ 숟가락 크기도 천태만상인데 아무거나 내 알아서 떠도 되남요?’‘네···’또 뒤에서 물었다.‘선생님~ 수북이 담아요? 날날하게 담아요?’‘네···에?’‘아니 이 사람아 사투리로 말하면 선생이 못 알아 묵지.그러니까 봉두로 뜨는가? 평두로 뜨나 말이요?‘‘네???’(퍼옴) 이젠 인간 선생도 사라질 판이다. 어떤 학습도 인터넷에 물어보면 되니까. AI는 봉두, 평두
이번 주는 우리 동네가 엄청 바쁘다. 나라가 어수선하든 말든 12월에 매듭을 지어야 하는 주 과제 중 하나가 김장이기 때문이다. 올해가 마지막일지도 모르니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오래 사신 어르신들의 노래도 이맘때면 꼭 되풀이된다.백수를 바라보시는 호순(가명) 어르신 댁 텃밭 배추가 옹골차다. 며칠 전부터 단단해진 배추를 똘똘이(바퀴가 달린 작은 수레)로 조금씩 나르신다. 트럭 가진 이가 한꺼번에 옮겨 드리려 하니 운동 삼아 하는 거라며 손사래를 치신다. 며칠 새 만리장성같이 쌓아졌는데 아마 200포기는 넘을 거라며 수군거린다.새벽
이모같이 정다운 이웃 어른이 건강 검진을 받은 후 얼굴빛이 어둡다.그는 고령이지만 얼마나 바지런한지 신체 나이는 나보다 더 젊으시다. 결과지 소견란에 적힌 ‘죽상동맥경화의심‘이란 처음 듣는 병명에 정밀검사까지 요한다니 표정이 죽상이 되어 건강하던 몸이 여기저기 아파온다. 그가 시집와서부터 드나들었다는 단골 의원에 모시고 갔다. 의사 선생님도 긴 세월을 함께하며 같이 늙으셨다.’나이 들면 모두가 비슷한 병명 하나씩 갖고 있다. 이 또한 건강관리만 잘하면 죽을 때까지 아무런 증상 없이 산다, 잘 먹고 운동 잘하고 잠을 푹 자면 아무 문
마을 노인회에서 경주 여행을 가기로 했다. 버스 안에서 먹을 간식거리를 싸고 있는데 열댓 명의 휴대폰이 동시에 울린다. ‘스마트 마을 방송’이다.내일 **리 어르신 가을 나들이를 가니 어디 어디 어디로 정해진 시간에 맞춰 나오시라는 연락망이다. 동네 스피커 소리에 온 동네 개가 따라 짖던 시대도 가고, 이제는 각자의 스마트폰이 방송국이 되었다. 어른들에겐 휴대폰이 신기하면서도 두렵다. 아침 날씨가 쌀쌀하니 일찍 나오지 말라고 다시 한번 시간과 장소를 일러 준다.나는 10년 전 이곳으로 이사 왔다. 낯선 마을 사람들은 홀로 들어온 나
건강하던 연예인의 급작스런 사망 소식이 뉴스로 전해진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노년기에 접어든 나 역시 황망함과 놀라움을 애써 감추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근간에 가까운 친척 어른도 아침밥 먹고 밭을 둘러보러 나가셨는데 점심때가 되어도 연락이 안 되어 찾아 나섰더니 밭 한가운데에 쓰러져 계시더란다.나이가 들어도 혼자 화장실 다니고 활동하다가 가신 분들을 보면 요즘은 그게 참 부럽다. 가는 날까지 되도록 내 신체를 남의 손에 맡기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그러려면 많이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내 어린 시절 엄마들은 어지간
작년부터 요가를 시작했다. 동네 주민 센터나 유튜브로도 무료로 배울 수 있으니 참 좋다. 젊은 시절에 본 요가는 몸매가 좋은 특별한 사람들만 하는 운동인 줄 알았다. 내가 운동이랍시고 하는 것은 앞만 보고 걷는 것과 아침에 십 분 정도 내 맘대로 하는 몸풀기 체조다.유연성이라곤 없는 60대 후반에 요가를 시작했으니 고강도 동작은 언감생심 흉내 내는 것도 미안하다. 그러던 내가 쉬운 동작부터 따라 하며 재미를 붙이고 어렵던 동작도 연습과 복습을 반복하니 얼추 자세가 잡혀간다.요가 수업 첫날, 혼자서 웃었던 일이 생각난다. 몸풀기 동작
10월이다. 가을이 오면 나는 계절병같이 살짝 우울해진다. 추석 전후로 남편 기일과 내 생일이 겹쳐 있어서다. 애쓰며 사는 자식들 주머니에서 목돈이 털린다. 모른 척하지만 엄청 미안하다. 오늘도 생일이라고 멀리 있는 아들네도 큰돈을 보내오고, 딸과 사위 손자에게서도 편지가 든 봉투를 받는다. 내년엔 더 많은 용돈을 드리기 위해 더 열심히 살겠다는 며느리와 사위, 그 말이 얼마나 고마운지 재벌 부럽지 않다. 이번엔 안동사랑 상품권도 두둑이 들어있다. 이건 지역 상권을 살리기 위해 안동에서만 소비할 수 있는 지역 화폐다. 손자 장학 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