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설악산에 갔다가 너무 일러 단풍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게 아쉬워 다시 길을 나섰다. 이번에는 전북 무주 덕유산이다. 이런, 아직도 단풍은 제대로 물들지 않았고, 덕분에 충청도 가을 여행만 실컷 했다. 오히려 더 좋았다.이 가을 공주 공산성은서울에서 덕유산까지는 세 시간이면 충분하지만, 일찍 도착해 봐야 만날 사람도, 할 일도 없다. 마침 공주를 지난다. 옆으로 빠져 커피 한잔하며 가을 냄새나 맡아봐야겠다.카페를 찾다 보니 공산성까지 왔다. 백제 도읍 웅진의 성(城)이자 금강을 끼고 있는 요새다. 산성이 올려다보이는 멋진 카페
유난히 덥던 여름 내내 축 처져 있었고, 10월 들어 무려 10일의 연휴, ‘이렇게 늘어져도 될까?’ 싶었다. 걱정도 팔자다. 좋은 계절이 되니 알아서 바빠진다. 만나자는 사람 많고, 할 일 많고, 사방에서 축제나 행사, 무엇보다 산과 들로 구경 다녀야지.단풍 보러 설악산에 왔다. 서울에서 점심 먹고 출발해서 속초에 도착하니 저녁 먹을 시간은 아직 멀다. 평창 올림픽을 기점으로 동해안은 서울에 바짝 다가왔다. 그래서 이쪽 사람들 삶이 나아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이 몰리면 돈과 이슈도 함께 몰리는 법, 요즘 관광지 바가지로 홍역을
여행은 3박 4일이 적당한 듯하다. 모처럼 떠나는데 2박은 좀 아쉽고, 4박은 지루하다. 해외여행이라면 이동 비용과 시간을 고려하여 좀 길게 잡기도 한다. 하지만 일상의 연속성을 깨지 않으려면, 비일상적 감흥과 일상적 평온함이 적절히 어우러지려면 역시 여행은 3박 4일이다. 그래선지 요즘 3박 4일 여행을 자주 한다. 나도 모르게 내 몸이 그 기간을 선택한 것 같다.얼마 전에 포항과 경주에 다녀왔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단골 코스다. 강원도에선 제주도로, 제주도에선 강원도 설악산으로 가던 때, 서울 학생들은 대부분 경주로 떠났다. 3
지금은 목요일 새벽, 급히 원고를 쓰고 있다. 마감이 코앞인데 너무 바빠 이번 주 원고를 준비하지 못했다. 백수가 왜 바빴냐고? 백수도 가끔 뭔가 몰릴 때가 있다. 자유와 불규칙성은 앞뒷면 관계니까. 지난주에는 필리핀에 다녀왔고, 그제는 강연, 어제는 대장 내시경 검사를 했다.두 끼를 굶고 밤새 속을 비우느라 화장실에 들락거린 터라 아주 힘들었다. 수면 검사가 끝난 후 잘 먹고 푹 잤더니 이제 좀 살만하다. 그래, 이번 주 원고는 강연 이야기로 때우자. 오랜만의 이벤트였으니.한동안 ‘해외 한 달 살기’를 주제로 강연했다. 긴 해외여
누가 내게 자기 친구를 소개해 주겠다고 한다. “사양할게. 우리끼리나 잘 지내자.” 몸과 마음이 강하던 시절에는 누구든 반가웠지만 나이 들수록 사람 만나는 게 별로다. 사람 많은 곳도 피곤하다. 때론 신경 긁는 인사들까지 있어 스트레스받는다. 수영장에서도 그렇다. 맨몸에 수영복 한 장 입었을 뿐인데도 성장 배경, 성향, 생각이 그대로 드러난다. 수영장에서 마주치는 꼴불견들 모습은 어떨까?어디서나 제멋대로인 사람들영화 에서 노스님(김인문 분)이 조폭들에게 내준 화두는 ‘밑 빠진 독에 물을 가득 채우라’였다. 이놈들, 깨
물속 ‘몸치’였던 나는 수영을 어렵게 배웠지만, 요즘 같으면 쉽게 배웠을 것 같다. 일단 수영장이 많아졌다. 환경만큼 중요한 게 없다. 게다가 유튜브 같은 동영상이 등장했다. 20년 전만 해도 동영상이 드물었다. 수영 중계 화면은 너무 빨라 도움이 안 되었다. 결국 고전적인 방법으로 책을 사서 그림을 보며 익히려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기막힐 일이다.사람마다 학습 스타일이 다르다. 우리 수영장 1등인 내 아내는 뭐든 자기 느낌대로 하는 스타일이다. 반면, 나는 이론을 중시하며 가르쳐준 대로 꼼꼼하게 따라 한다. 이런 성향은 대물림
“잘 되세요?” 강습 후 탈의실에서 초급반 회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시작한 지 두 달쯤 되었을까? 어느 정도 늘었는지 모르겠지만 한 청년은 살이 많이 빠졌다. 다른 이가 내게 다이빙 스타트를 해봤냐고 묻는다. 그게 가장 기대된다고 해서 나중에 배우면 잘하게 될 거라고 덕담해 주었다.그들은 자유형, 배영, 평영까지 배웠을 테니 이제 어디 가서도 물 밖에서 혼자 멍때리고 있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런데 남부럽지 않게 수영하려면 얼마나 해야 할까? 질문이 너무 모호한가? 그렇다면 살짝 바꿔보자. 수영을 1년 배우면 어느 정도 하게 될까
일상에서 뭘 선택할 때 가장 기본이 되는 핵심 요소가 있다. 호텔은 침구가 청결해야 하고, 병원은 병을 잘 낫게 해주어야 하고, 입시학원은 진학률이다. 그렇다면 수영장을 선택할 때는?시설, 접근성, 강습, 이용료 등도 중요하지만 내 생각에는 내 몸에 닿는 물, 즉 수질(水質)이 먼저다. 그런데 눈으로 보거나 소독약 냄새를 맡거나 수질 관리표를 봐서는 수질을 확인하기 쉽지 않다. 사람들의 입소문과 평가로, 그리고 내 몸으로 점검해야 한다. 몇 번 다녀본 후 피부가 어떤지, 눈은 씀벅거리지 않는지 말이다.실내 수영장 물은 얼마나 자주
요즘 ‘수린이’들로 수영장이 붐빈다. 수린이는 ‘수영+어린이’, 수영을 처음 배우는 사람이다. 새해 첫날이면 학원, 헬스장, 수영장, 등산로 등 곳곳에서 도전의 열기가 들끓다가 다시 잠잠해지는데, 수영장은 7월에 다시 북적인다. 폭염에, 방학에, 수영을 배워야 할 뚜렷한 목적까지 생긴다. 곧 휴가철이다. 휴양지에서 멋진 추억을 만들려면 수영이 필요하다. 그런데 너무 임박한 것 아닐까. 어찌 될지 보자.멀리서 초급반 첫 수업을 지켜보자니 물에 뜨는 것부터가 큰 도전이다. 물에는 부력이 있고 사람 몸은 폐의 공기와 지방 때문에 물보다
옆 레인 사람이 플립 턴(flip turn)을 한다. 몸을 돌린 후 천천히 잠영하며 나가다가 자유형을 시작한다. 금세 50m를 다녀와 똑같은 자세로 반복한다. 동작이 정확하고 자연스럽다.플립 턴은 물속에서 앞으로 핑그르르 돈 후 벽을 차고 나가는, 수영 선수들이 실제 경기에서 하는 동작이다. 간단해 보여도 미세하게 신경 쓸 게 많아 꽤 어렵다. 붐비는 수영장에서는 연습하기도 쉽지 않아 아마추어들은 대부분 쉬운 사이드 턴(side turn)을 한다.스포츠 분야에는 어떤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대표 기술이 있다. 예를 들면 당구에서
선물 받은 전기면도기로 솜털뿐인 턱을 밀어보던, 치킨과 피자 좋아하던 아이가 어느새 군인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계엄군이 되어 국회에 진입했다. 많은 이가 군인은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다며, 그래도 사람 안 다치게 살살 움직였다며 감싸주지만, 마치 정권 하수인 대하듯 욕하는 이도 있다. 가슴 떨리고 마음이 찢어진다. 내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 부모 마음을 상상해 봤다. 이래서야 자식 군대 보낼 일이 막막하겠다.그 친구들은 무슨 잘못을 한 걸까? 수뇌부와 연결된 지휘관도 아니고, 무슨 일인지도 모르던 사병들이다. 군인은 명령에 복종해야
해마다 이맘때면 나의 시골 금산에서는 집집마다 감을 깎았다. 우리 집은 커다란 감나무가 마당에 한 그루, 논둑에 두 그루 있었는데 해마다 감이 백 접씩 나온다고 했다. 한 접이 백 개이니 만 개, 도저히 믿기지 않는 숫자이지만 사실이었다. 어른들은 끝이 Y자로 벌어진 긴 장대를 감이 많이 달린 가지에 걸고 비틀어 뚝뚝 끊어냈다. 어린 내 눈에는 아주 재미있는 놀이처럼 보였지만 어른이 된 후 해보니 장대를 들어올리기조차 힘들었다.수확한 감은 어느 정도는 팔고, 나머지는 가족들이 전부 달려들어 깎아 말렸다. 제수용과 간식용 곶감을 만드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에 온 나라가 들뜬 지 몇 주 만에 다시 조용해졌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또 진작부터 그의 작품세계가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하던 사람으로서 놀라움과 동시에 찾아온 기쁨의 크기는 아직도 어림 되지 않는다.나는 한강 작가의 연세대 국문과 2년 선배다. 하지만 그 작가와 개인적으로 알지 못한다. 한 학년이 60명이니 자주 마주치기는 했겠지만, 그는 조용히 자기 세계에 몰입한 사람이고 나는 문학 언저리를 맴돌다 취업하여 일생을 직장인으로 살아왔다. 그러니 나로서는 그저 훌륭한 문인과 한 공간에 있었던 인연
40년 전 경주 수학여행 때였다. 한 친구가 어느 서양인 부인과 사진 찍는 걸 보고 "나도, 나도!" 하며 이놈 저놈 달라붙어 서양인 한 명을 동양인 수십 명이 둘러싼 사진이 되었다. 선교사나 의료봉사자도 아니고, 인기 절정이던 피비 케이츠나 소피 마르소도 아니고, 그냥 노랑머리의 서양 아줌마였다. 그래도 우리는 신났고, 이런저런 영어도 해 보았다. 그 시절엔 외국인이 얼마나 신기했던가.아내와 튀르키예 여행 중이다. 오늘은 이스탄불 동남쪽 이즈니크(Iznik)에 들렀다. 이 도시의 옛 이름은 니케아(Nicaea), 이곳에서는 예수의
은퇴 후 지방에서 살겠다던 계획대로 전주에 내려온 지 6년, 다시 서울로 돌아간다. 가고 싶지 않지만 가야 한다.전주에서의 첫해는 아주 좋았다. 마당 있는 한옥에서 아침마다 새 소리 들으며 일어나고, 어설픈 솜씨로 집안 곳곳을 관리해 가며 여유롭게 사니 직장인 시절의 로망을 이룬 듯했다. 계절마다 꽃이 피고, 강아지는 마당에서 뛰어놀고, 서울 손님도 자주 찾아오고, 언론에도 내 일상이 몇 번 소개되었다. 2018년이었다.그렇게 1년 지나니 손님 대신 코로나가 방문했다. 아내가 먼저 입원하고 나는 집에서 격리하던 중에 증상이 나타났다
아무래도 전세 예산을 6억5000보다 더 올려야 할 것 같다. 전주에 내려간 5년 사이에 서울 전세 시세가 너무 올랐다. 2018년까지 목동 신시가지단지 55평(181.8㎡)에서 5억2000에 살았고, 지금 전주 아파트는 35평(115.7㎡)이 3억7000이다. 6억5000이면 서울 적당한 지역이나 수도권에서 지은 지 10년 이내 아파트 전세를 쉽게 구할 줄 알았다.그런데 ‘얼죽신(얼어 죽어도 신축)’이란 말처럼 신축 아파트 인기가 치솟아, 이 돈으로는 서울에서 25평(82.6㎡)대 전세도 쉽지 않았다. 이러니
이사를 해야 한다. 전주에 내려온 지 5년 반 만에 다시 수도권으로 간다. 몇 년 전에 ‘전주에 내려오니 너무 살기 좋다’는 글을 썼을 때, “3년 정도 살고도 그런 말 나오는지 두고 보자”라는 모진 댓글이 달렸었다. 나하고 꽤 다른 사람이었나 보다. 난 아예 전주 사람이 다 됐다. 주변에는 “은퇴하면 지방으로 내려와 살라”며 전도하고 다녔다. 그런데 내가 도로 올라간다.첫째 이유는 지방의 최대 약점인 병원 때문이다. 재작년에 암을 진단받고 서울을 오가며 일단 치료는 끝냈지만, 응급상황이 오면 다니던 병원으로 가야 한단다. 둘째는
긴 불볕더위 속에서 파리 올림픽이 그나마 한줄기 시원한 물줄기가 되어주었다. 처음에는 좀 이상했다. 국민적 호응을 당부해야 할 대한체육회가 미리부터 ‘이번에는 성적 시원찮을 테니 기대하지 말라’며 김을 빼놨다.나는 그간의 보도를 통해 체육 예산, 엘리트 체육, 학원 체육에 근본적인 정책 변화를 모색하는 정부와 엘리트 체육 실행기관인 대한체육회 사이의 갈등을 알고 있다. 위기의식을 느낀 대한체육회가 삐져서 “돈 안 주면 성적 나빠요”하고 항변한 것이다.하지만 시작부터 선수들은 은메달, 금메달, 연이은 승전보를 전해왔다. 경쾌하고 힘찬
, 이 책이 언제부터 책장에 꽂혀 있었는지 모르겠다. 오래전에 누가 선물했나 보다. 싱가포르 독립 역사는 흥미롭다.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 투쟁을 한 게 아니라, 제발 함께 살자고 애원했으나 눈물 속에 이혼을 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손톱만 한 싱가포르섬은 화교들이 건설한 경제 중심지였고 드넓은 말레이시아 본토는 말레이인들이 일차 산업 중심으로 살고 있었으니, 뇌가 몸과 분리되어 내던져진 셈이다. 몸은 어떻게든 움직이겠지만 뇌는 몸으로부터 산소를 공급받지 못하면 멈춘다. 그런 나라를 살려 선진국으로 만든 리콴유(李
퇴직 후 전주에 내려온 지 5년 넘었다. 전주는 살기 좋은 곳이다. 수도권보다 낮은 물가에, 수영장이나 도서관 같은 편의시설 충분하고, 무엇보다 음식이 맛있다. 한 끼 1만원이면 서울보다 훨씬 푸짐하게 식사를 해결한다. 이미 ‘전주 입맛’에 길들어 가끔 접하는 서울 음식이 낯설다.전주가 ‘맛의 도시’라곤 해도 유명 맛집은 별로 없다. 맛집은 사람 많고 외식업이 번창한 곳에서 생겨나는데 전주는 큰 소비가 이루어지는 도시가 아니다. 대신 전주의 절묘한 맛은 각 가정에 들어있다. 이곳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미뢰를 가졌길래 이렇게 맛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