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들과 두 시간가량 서울 여러 길을 걸으면서 건축과 역사 이야기를 나눈 지 몇 년이 되었다. 그동안 다녔던 길마다 특징이 있다. 우이신설선 삼양역 인근에 문을 연 지 50년이 넘은 황해이발관에서 시작해서 화계역 인근에 있는 삼양탕까지 이어지는 오래된 골목길을 걷는다.삼양탕도 문을 연 지 50년 정도 된 목욕탕이다. 삼양동 골목에는 작은 봉제공장도 많고 실이나 단추 전문 업체도 있다. 아직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골목을 걷다 보면 문설주에 주인장 이름을 돌에 새겨 문패를 걸어둔 집도 만날 수 있다.4호선 한성대입구역에서
오래전 여의도 6.3빌딩이 완공되고 나서 전망대에 오른 외국인 중에 여의도 아파트 단지를 내려다보며 아파트 지붕마다 잘 가꾸어진 조경에 감탄사를 연발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사실은 녹색의 방수공사를 해 둔 것이었는데, 높은 데서 내려다본 그들 눈에는 아파트 지붕마다 잔디를 잘 가꾸어 놓은 옥상정원으로 보였던 것이다.요즈음 나는 아직 개발이 진행되지 않아 과거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동네를 자주 걷는다. 이런 동네에는 대부분 외부 형태가 비슷한 주택들이 좁은 골목 양쪽을 따라 죽 이어져 있다. 주로 2층 주택인데 외벽 재료
너도나도 전원주택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특히 수도권 5대 신도시가 조성되고 난 199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그랬다. 당시를 회상해 보면 수도권 주변 전원주택 분양 광고가 여기저기 넘쳐났다.좋은 땅 소개하겠다는 전화도 수시로 왔다. 정말 싸고 좋은 땅이라면 무작위로 전화해서 유혹할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러한 부동산 사기 전화나 허위 분양 광고에 속아서 상당한 금액의 피해를 본 사람이 많다.진입도로가 없어서 맹지인 땅을 도로에 접한 것처럼 교묘히 도면을 만들어서 팔기도 하고, 허가가 불가능한 지역은 땅의 서류를
거제도 동남단에 도장포라는 작은 어촌마을이 있다. 그 이름에서 추정이 되듯 도장포는 도자기와 관련이 있는 이름이다. 고려시대에 중국과 일본 등지를 다니던 무역선의 도자기 창고가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거제도 지도를 보면 거대한 새가 날개를 펼친 형상이다. 도장포는 그 새의 한쪽 날개에서 툭 튀어나온 발가락 모양을 하고 있다. 그 튀어나온 지형의 북쪽 사면에 자리 잡은 도장포는 남쪽이나 남서쪽에서 올라오는 태풍에 안전한 천혜의 포구다.나는 20여 년 전에 도장포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도장포마을에서 태어나고 그곳에서 평생 살고 계신 분
내가 처음으로 단양에 가 본 것은 1979년 여름이다. 건축과 동기 중에 단양 매포가 고향인 친구가 있었다. 당시 그 친구 부모님은 단양 매포에 살고 계셨다. 그해 여름 건축과 동기 둘이서 그 친구 집으로 놀러 가게 되었다. 동네 주변에 있는 큰 돌산은 능선이 다 드러나 있었고, 거대한 시멘트 공장이 여기저기 보이고 돌먼지가 날리는 좀 심란한 동네였다.그러나 멀지 않은 곳에서 만난 도담삼봉은 그야말로 선경이었다. 물 위에 떠 있는 세 봉우리 중에 가운데 봉우리에 있는 누각에 올라가서 사진도 찍고 근처 석문도 구경했다. 도담삼봉이 2
사람 구경도 하고 리모델링 아이디어도 얻고 싶을 때 익선동으로 간다. 3호선, 5호선 종로3가역에 내리면 바로 익선동 골목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여러 개의 좁은 골목을 따라 빽빽하게 늘어서 있는 작은 가게는 다다익선 익선동이라는 말에 걸맞게 구경거리를 제공한다. 언제부턴가 익선동을 다녀온 사람들이 SNS에 공유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고 영화, 드라마에도 나오면서 급속히 떴다. 행인 중에 외국인이 상당히 많다.익선동 한옥마을은 일제강점기에 분양된 주택단지라고 한다. 독립운동을 지원하던 부동산개발업자가 조선인 서민들에게 분양한 주택단
지하철 1호선을 타고 가는데 누가 큰 목소리로 “나 지금 방학이야~!” 하기에 쳐다보니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이었다. 무슨 노인대학이 방학인가 하고 잠시 고민하던 차에 지하철 안내 방송이 나왔다. “이번 역은 방학역입니다.” 서울에도 재미있는 지명이 많이 있다. 그중에 방학동은 온통 방학이다. 유치원도 방학이고 초, 중, 고도 모두 방학이다.그런데 방학동에는 일 년 내내 방학이 없이 흐르는 방학천이 있다. 방학천은 중랑교로 유입되는 13개 지류 중 하나다. 방학동에 접한 도봉산 기슭에서 발원하여 상계교 인근에서 중랑천으로 흘러 들어간
그동안 ‘어디서 살 것인가?’라는 주제로 강의하면서 수강하시는 분들의 반응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많이 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대략 십여 년 전까지는 전원주택이 화두였다. 당시 퇴직을 앞둔 시니어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를 보면 퇴직 후 전원주택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공간은 답답하고 시간은 늘 부족한 도시에서 평생 일만 하고 살았으니 퇴직하고 나서는 확 트인 자연 속에서 느긋하게 살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나도 서울 인근에서 전원생활을 해볼까 하고 답사를 다니기도 했지만 이런저런 걱정으로 망설이다가 결국 포
나는 건축과에 1977년에 입학했기에 ‘77학번’이다. 공과대학에 속한 건축과에서는 수학이나 일반물리가 필수과목이었다. 대학에 가서는 쳐다보기도 싫었던 과목이다. 1학년부터 펑크가 나기 시작한 물리는 3학년까지도 펑크가 났다. 4학년이 되어서도 1학년 후배들과 같이 공부해야 했으므로 물리 수업 시간에 들어가지 않았다. 결국 물리 과목이 내 발목을 잡았다.1학년 말에 가입한 ‘공간연구회’라는 건축동아리는 건축설계를 희망하는 학생들의 모임이었다. 일 년에 몇 개월씩 동아리 방에서 합숙하면서 선배들에게 건축설계를 배우고 건축 작품전을 준
어느 포럼 행사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같은 테이블에 합석한 적이 있다. 서로 명함을 주고받고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었는데 유독 한 사람이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는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겨서 포럼 시작 전까지 아쿠아리움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는 모 대학교 문화컨텐츠학과 교수였고 당시 나는 코엑스아쿠아리움 부사장이었다.며칠 후에 그로부터 전화가 왔다. 학생들을 데리고 아쿠아리움 관람을 가고 싶다고 하면서 학생 수는 40여명이라고 했다. 아쿠아리움과 관련이 있는 문화컨텐츠학과 학생들이라 마케팅 부서와 협의해서 5
경주시 외곽 산골에서 살다가 초등학교 3학년 진학하던 해 서울로 이사 왔다. 그해가 1967년이었다. 서울에 오기 전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산골에 살았다. 밤에 청량리역에 내려서 호롱불이 하늘에 좍 달려있는 것을 올려다보면서 참 신기했었다. 가로등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처음엔 제기동에 살았는데, 그 시절 오래된 기와집이 많았다. 며칠 후에 어머니께서 싸 주신 도시락을 하나 들고 서울 구경에 나섰다. 청량리에서 동대문과 종로로 이어지는 대로에는 전차가 다니고 있었다. 제기동에서 신설동을 거쳐 동대문을 지나서 종로통을 걸었다.
내가 사는 동네 주위로 불암산, 수락산, 사패산, 도봉산, 북한산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 일명 불·수·사·도·북이라고 부르는 강북 5대 명산이다. 여기 5개의 산을 한 번에 종주해야 진정한 산악인이라는 말도 있다. 쉬지 않고 종주하는 데 대략 20여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저녁에 불암산을 출발해서 수락산, 사패산, 도봉산을 넘고 다음날 오후에 북한산 종점에서 마무리하는 산행은 그야말로 체력과 정신력 끝판왕들의 행군이라 하겠다.나의 고등학교 동창생들이 젊은 시절 매년 불수사도북 종주 행사를 하곤 했다. 하룻밤을 꼬박 새워가며 다섯
수도권에 테마파크가 없던 시절 어린이들에게 능동 어린이대공원의 인기는 대단했다. 정문을 들어가면서 마주하는 음악분수는 아이들을 환상의 세계로 안내하기에 충분했다. 동물원, 식물원이 있고, 바다 동물도 볼 수 있었다. 특히 청룡열차를 비롯한 각종 탈것을 갖춘 놀이동산은 아이들에게 환상적인 놀이터였다.어린이대공원이 호황을 누리던 중 유사한 테마이면서 규모는 어린이대공원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큰 용인 에버랜드와 과천 서울대공원, 롯데월드 어드벤처가 생기면서 어린이들이 그리로 다 몰려갔다.과천 대공원에 이어 청룡열차를 비롯한 놀이시설
오래전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 인상 깊었던 것 중의 하나는 로마의 주말 구제시장이었다. 세상의 구제 상품을 다 모아 놓은 듯 거리를 꽉 채운 만물상도 인상적이었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여행 온 관광 인파도 인상적이었다. 시장 복잡한 곳을 조금 벗어난 골목에 앉아 작은 보자기를 펴고 동전 몇 개씩을 팔고 있는 노인들이 있었다. 전부 로마 시대 동전이라고 했다.진품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동전에 관심을 보이는 이는 별로 없었다. 걱정스럽게 물었더니, 안내하는 분의 설명으로는 그 노인들이 동전을 팔 목적보다 벼룩시장이 열리는 도시마다 여기
지하철 4호선 혜화역 2번 출구로 나오면 마로니에 공원이 있다. 광장에는 거대한 은행나무도 있고 느티나무도 있는데 마로니에 나무의 생김새가 좀 이국적이기도 하고 그 발음이 좀 낭만적이라 마로니에 공원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아닐까. 사계절 내내 활기가 넘치는 마로니에 공원은 답답한 도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다.1975년에 서울대 문리대가 관악 캠퍼스로 이전하면서 이 일대가 개발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마로니에 공원 주변에는 유명 건축가들의 작품이 많다. 우선 우리나라 1세대 근대 건축가인 박길룡의 작품인 구 서울문리대
청계천은 서울 중심부를 흐르는 하천이다. 과거 일제강점기 시절의 기록사진을 보면 천변으로 판잣집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나무 기둥은 하천 바닥에 고정하고 집은 공중에 떠 있는 소위 필로티 구조로 지었다. 하천은 국가 소유이기도 하지만, 오수처리에도 편리하므로 오갈 데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터를 잡기 좋았을 것이다.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고단한 삶이야 어찌 짐작할 수 있겠냐마는 그 판잣집들이 자꾸 조형적으로 보이는 것이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에게 죄스러울 뿐이다.1958년부터 복개 공사가 시작되면서 여기에 살던 사람들은 서울 외곽으로
내가 초등학교 4학년으로 올라갈 때 중랑천이 흐르고 있는 면목동으로 이사를 갔다. 우리 집은 용마산 아래 있었지만, 중랑천 변 판잣집에 사는 친구들이 있어서 자주 놀러 갔다.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은 골목을 요리조리 돌아 들어간 기억도 난다. 벽은 블록으로 쌓고 그 위에 지붕 서까래를 얹고 나서 루핑이라는 검은 기름종이를 깔면 집이 완성되었다.그 루핑이라는 기름종이는 방수가 되었던 모양이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과연 루핑이라는 재료가 있다. 종이에 아스팔트를 침투시키고 그 위에 피복용 아스팔트를 부착하고 마감으로는 운모
북한산 국립공원이 지척인 동네에 산 지 35년이 되었다. 우리 동네는 북한산국립공원에 포함된 사패산, 도봉산, 북한산 외에도 수락산, 불암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산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은퇴하고 나면 다들 산으로 간다던데 나는 젊은 시절부터 산을 즐겼다.건축하는 동료들과 주말마다 같이 다닌 적도 있지만 대체로 혼자 다니기를 좋아한다. 같이 다니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정작 산이 들려주는 자연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내려오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온 세월의 반 이상을 명산으로 둘러싸인 동네에 살았으니 산길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고등학교별 입시 시험이 없어지고 평준화라는 명목으로 추첨제로 바뀌었다. 소위 뺑뺑이라 불렀는데 나는 운이 좋아 지금은 경희궁으로 복원된 그 자리에 있던 명문 고등학교에 자의 반 타의 반 입학하게 되었다. 뺑뺑이로 입시제도가 바뀐 것이 ‘타의’라면 서울 외곽 동네인 면목동에 살면서 공동 학군인 서울 중심부에 있는 고등학교를 지망한 것은 '자의‘라고 할 수 있다.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경희궁에 별 관심이 없었다. 교정에 남아있는 경희궁 유적에 얽힌 몇 가지 이야기를 들은 것이 전부였다. 교사
최근에 세운상가의 공중 보행로를 철거하느니 존치하느니 말이 많다. 전임시장의 도시재생 정책의 일환으로 무려 1100억원을 들여 만들어 놓은 구조물을 개통 2년 만에 또 수백억원을 들여 철거할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공중 보행로를 설치하기 전에 그 타당성을 주장하고, 검토하고, 승인하고, 실행한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1100억원이면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918년부터 최근까지 매년 1억원씩 저축해야 되는 돈이다. 그렇게 많은 돈을 들인 시설을 몇 년 만에 철거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한다면 앞으로 이런 일이 반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