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향성만 강조하고 구체적 방안 공백
스테이블코인 ‘준비자산 설계’가 95%
유동성 붕괴 위험 시나리오 대비해야

함영주 하나금융그룹 회장 /여성경제신문DB
함영주 하나금융그룹 회장 /여성경제신문DB

하나금융그룹이 최근 발표한 스테이블코인 보고서는 원화 기반 토큰의 국내 도입을 은행 관점에서 정리하며 기존 논의를 한 단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시중은행이 참여하는 모델을 전면에 놓고 금융 감독체계와의 연계 가능성을 짚은 점은 현실성을 갖춘 접근이다. 다만 발행 주체·준비자산 구조 등 핵심 설계 요소는 대부분 개괄적으로만 언급돼 제도화를 위한 구체성은 여전히 과제로 남는다.

26일 금융권 의견을 종합하면, 국회가 추진 중인 원화 스테이블 제도화 논의에서 금융지주 연구조직이 ‘은행 참여 모델’을 구체적으로 검토했다는 점 자체는 고무적이다. 그러나 보고서는 방향만 제시한 채 실제 제도 설계를 뒷받침할 핵심 항목들이 상당 부분 비어 있어 구조적 완성도는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가장 두드러진 공백은 발행 구조의 기초가 되는 ‘주체 구성’이다. 은행 단독 발행인지, 복수 은행이 참여하는 컨소시엄인지, 공동 발행(Co-Sponsoring) 구조인지에 따라 거버넌스와 리스크 책임, 정책 조율 방식, 시장 수용성이 완전히 달라지지만 보고서에는 선택지조차 제시되지 않았다. ‘은행 발행’이라는 문구만 존재할 뿐, 구체적 형태는 설명되지 않은 셈이다.

두 번째 공백은 스테이블코인의 신뢰를 지탱하는 준비자산(reserve) 설계다. 100% 현금성 자산 중심인지, T-Bill·CP·MMF 등으로 분산하는지, 시장 변동성에 따라 자동 조정하는 로직을 적용하는지에 따라 안정성과 수익성은 크게 달라진다. 미국·EU·싱가포르 등 규제권은 준비자산 공시·구성·운용 규제를 가장 강하게 설계하지만, 보고서는 통화정책·채권수요 영향만 설명한 채 정작 준비자산 조합은 비워뒀다.

보고서는 미국·일본의 T-Bill 구조와 단기자금시장 반응을 설명한 대목에서 비교적 완성도가 높다. 스테이블코인 준비자산이 단기금리에 미치는 변동폭, MMF·CP·T-Bill 간 상호작용, 미국과 일본의 T-Bill 수요 차이를 상세히 다루며 해외 사례를 충실히 반영한 흔적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정작 ‘국내 원화 스테이블코인’ 실물 설계는 거의 제시되지 않았다. 준비자산 비율, 환매 충격 발생 시 유동성 회수 우선순위, 발행사·수탁기관·감독기관 간 역할 구조, 회계·외감 적용 범위, BIS 자본규제·LCR·NSFR 등 은행 규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본론은 빠져 있다.

한국은행이 지적하듯 스테이블코인의 최대 위험은 ‘가격 변동’이 아니라 환매(run) 상황에서 발생한다. 발행사가 예금·단기채·MMF로 준비금을 구성해두었다가 대규모 상환 요구가 몰리면 얕은 유동성 풀은 즉시 고갈된다. 뒤늦게 환매를 시도하는 투자자에게 손실이 전가되는 ‘지급불능 이전 단계의 유동성 붕괴’다. 디지털 토큰 특성상 한 번의 불신이 전체 자산의 동시 환매를 촉발할 수 있어, 전통 금융보다 취약성이 더 크다.

특히 준비자산 중 MMF나 단기채 비중이 높을 경우 위험은 더욱 커진다. 환매 요구가 폭증하면 발행사는 자산을 급매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가격 하락 → 발행사 손실 확대 → 페그 붕괴 → 추가 환매라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2023년 미국 ‘프라임 MMF’에서처럼, 평소 유동성이 좋아 보이던 상품도 집단 매도 상황에서는 유동성 착시가 즉시 사라지며 시장 충격이 증폭된다. 약세 통화인 원화 기반 토큰일 경우 충격 전이 속도는 더 빠르다.

스테이블코인은 ‘토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준비자산 설계가 95%를 결정하는 금융 인프라다. 준비자산 조합이 가격 안정성을, 유동성 규칙이 신뢰를, 회계·감독체계가 금융안정성을 좌우한다. 예금·단기채·RP·MMF·신탁계정·결제망 등 국내 금융 인프라를 반영한 구체 설계 없이 발행을 논하면 정책 실효성은 사실상 제로에 가깝다.

금융당국이 우려하는 디페깅·코인런·통화정책 약화 등 부작용은 결국 준비자산 설계, 유동성 스트레스 규칙, 자본규제 연계, 결제망 접속 방식이 없는 상태에서 대규모 토큰을 발행할 때 발생한다. 예를 들어 “100% HQLA 준비금과 도산격리 신탁을 의무화하면 위험을 차단할 수 있다”는 민병덕 의원의 견해만으로는 안전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보고서에는 정산 인프라 선택지도 제시되지 않았다. 정산망과 원장을 은행 간 공유할지, 금융결제원·카드망과 연동할지, 민간 블록체인을 활용할지 여부는 네트워크 비용·처리 속도·투명성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다. 공동원장·분리원장 중 어떤 원장을 채택하느냐만 해도 법적 구조와 규제 체계가 크게 달라진다.

하나은행은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발행사 서클(Circle)과 스테이블코인 사업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최근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시장 선점을 목표로 16건의 관련 상표를 출원한 가운데, 서클이 유로·엔 기반 스테이블코인까지 발행하며 사업 영역을 확대하는 흐름과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로 풀이된다. 업계에 따르면 구체적 협력 범위와 구조는 향후 협의를 통해 결정될 예정이며, 하나은행이 출원한 ‘KRWC’ 상표가 서클의 USDC·EURC와 동일한 방식으로 ‘C’를 붙인 점을 들어 양사가 공동 발행 모델을 고려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된다. / 여성경제신문DB
하나은행은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발행사 서클(Circle)과 스테이블코인 사업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최근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시장 선점을 목표로 16건의 관련 상표를 출원한 가운데, 서클이 유로·엔 기반 스테이블코인까지 발행하며 사업 영역을 확대하는 흐름과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로 풀이된다. 업계에 따르면 구체적 협력 범위와 구조는 향후 협의를 통해 결정될 예정이며, 하나은행이 출원한 ‘KRWC’ 상표가 서클의 USDC·EURC와 동일한 방식으로 ‘C’를 붙인 점을 들어 양사가 공동 발행 모델을 고려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된다. / 여성경제신문DB

네 번째 공백은 스테이블코인과 기존 은행업의 핵심 기능—예금·대출—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에 대한 설계다. 토큰이 예금과 등가라면 지급준비율·BIS 규제와 충돌하고, 별도라면 예금 대체 효과가 생긴다. 두 경우 모두 정책·제도적 조정이 필요하지만 보고서는 이를 ‘새로운 수익원 가능성’ 수준으로만 언급했다.

다섯 번째 누락은 발행·소각(mint/burn) 권한 구조다. 발행량 조절을 은행 단독으로 맡길지, 금융위·금감원이 사전 승인할지, 온체인 모니터링을 도입할지에 따라 정책 유연성과 리스크 관리 방식은 완전히 달라지지만 보고서는 단순 가능성 언급에 그쳤다.

결국 이번 분석은 스테이블코인이 자금시장·채권시장에 미칠 영향을 폭넓게 다루면서도 정작 ‘은행 발행 모델’의 현실적 설계 기반은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한다. 발행 주체, 준비자산, 정산 인프라, 예금·대출 구조, 발행·소각 규칙이라는 다섯 축은 원화 스테이블코인 제도화의 최소 필요조건이지만 보고서에서는 모두 공백으로 남아 있다.

김영훈 경제지식네트워크 사무총장은 여성경제신문과의 통화에서 “하나금융연구소 분석이 국내 논의의 출발점을 넓힌 것은 분명하다”며 “은행 중심 스테이블코인 발행의 개략적 설계라는 측면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실제 발행을 위해 반드시 다뤄야 할 민감한 내용의 논의가 부족한 점은 아쉽다”고 말했다.

여성경제신문 이상헌 기자 
liberty@seoul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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