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이 절정’은 이때 쓰는 말이구나 싶었다. 멀리 보이는 높은 산부터 동네 뒷산, 공원과 집 앞 가로수까지 울긋불긋 고운 이불을 덮어쓴 것처럼 색 잔치다.산의 약 20%가 물들면 첫 단풍이 들었다고 말하고, 80% 정도가 물들었을 때를 절정이라 한다니 앞으로 며칠간 붉게 물든 나뭇잎들을 바짝 감상해야 한다. 올해는 늦더위로 예년보다 1주일 이상 단풍 드는 시기가 늦었다고 하니 가을과 동격인 단풍을 기다렸던 마음과 금방 사라질 거라는 아쉬움에 이 시간이 귀할 뿐이다. 과학적으로 말하면 단풍은 날씨의 변화로 식물의 녹색 잎이 붉은색이
몇 달 동안 베란다에 방치해둔 화분들을 정리했다. 올봄 크고 작은 키의 식물 몇 가지를 심었는데 이번에도 제대로 키우지 못했다. 스스로 식물을 잘 돌보지 못한 ‘검은 엄지손가락(Black Thumb)’이란 걸 알기에 관리 난도가 낮은 스킨답서스와 행운목을 들여왔는데 또 실패하고 말았다.한동안은 혹시라도 다시 초록이 올라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그대로 두었고, 그 이후에는 살아있는 식물을 또 이렇게 죽였다는 자책감에 화분이 놓인 쪽은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러다 지난 주말 인제 그만 보내야겠다고 생각해 바싹 마른 뿌리들이 엉겨 있는 흙
나이가 드니 집의 의미가 달라진다. 20~30대의 집은 바깥 활동을 마치고 돌아와 휴식을 갖는 곳(住, 머무르며 사는 곳)이었고, 결혼 후 집은 남편과 아이와 함께 가족이 생활할 수 있는 공간(家, 혈연 등으로 이어진 사람들과 함께 사는 곳)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바라는 집은 내가 살고 싶은 방식을 담은 공간, 나를 닮은 공간이다.아직은 가족이 생활하기 적합한 위치의 아파트에서 살고 있지만, 아이가 성인이 되어 자립할 때가 되면 그런 집을 꾸리며 살겠다는 계획을 매일 하고 있다. 갑자기 집 이야기를 꺼내는 건 얼마 전 올해 말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추석 연휴 느긋한 마음으로 소파에 앉아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반가운 노래를 듣게 됐다. 가수 이동원과 테너 박인수가 함께 불렀던 ‘향수’를 트윈폴리오 송창식과 윤형주가 부르고 있었다. TV에서는 공연 실황을 담은 (MBC)가 방송 중이었다.1989년 발표된 이 곡은 정지용 시인의 시 ‘향수’를 노래로 만들었다는 점과 당시에는 파격적이었던 가수와 테너가
지난 9월 20일은 청년의 날이었다. 매년 9월 셋째 주 토요일인 청년의 날은 2020년에 청년기본법에 따라 제정된 법정기념일이다. ‘청년의 권리 보장 및 청년 발전의 중요성을 알리고, 청년 문제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날이기에 지난주부터 이번 주까지 전국 곳곳에서는 지자체, 공공기관, 기업 및 각종 단체가 주관한 다양한 청년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정부에서도 20일 청년의날 기념식을 시작으로, 20일과 21일 주말 양일간 청년정책 박람회를 서울광장에서 열었고, 26일까지 한 주를 청년 주간으로 정해 온오프라인에서 청년
지난 주말 여의도에서 열렸던 제5회 문화도시 박람회에 다녀왔다. 업무로 지역문화 사업 담당관들을 만나야 해서 가게 되었지만, 이전부터 37개 ‘문화도시’가 지향하는 문화정책과 활동은 각각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리고 지역 주민들은 그것들을 어떻게 향유하고 있는지 궁금했던 터였다.문화도시는 '지역문화진흥법'에 따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지정하는 도시로, 지역 고유의 문화자원을 활용해 지역 주민의 창조력을 강화하도록 지원하는 곳이다. 문화도시 지정은 2020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일정 기간 제공되는 정부의 지원을 기반으로 각 지역의 문화적
아이의 생일을 전후로 집 앞에 택배 박스가 쌓였다. SNS로 선물을 보내면 받는 이가 주소를 입력해 집으로 배달이 오는, 요즘 아이들은 이렇게 생일 축하를 하는 모양이다. 화장품부터 초콜릿, 인형··· 그 또래 아이들이 주고받을 만한 선물들이 속속 도착했다.그중 눈에 띄는 선물 하나가 있었다. 친구가 직접 전해주었다며 자랑하듯 보여준 문학과지성사의 시집이었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시 몇 편에 특별히 포스트잇을 붙여 선물한 것이다. 수능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고3인데 이렇게 마음을 담은 선물을 준비하다니!시집은 진은영 시인의
국립극단의 연극 을 관람했다. 출연 배우 지춘성의 젊은 시절 대표작으로 알려진 함세덕 원작의 연극 을 모티브로 요즘 가장 주목받는 연출가 이철희가 새롭게 극본을 써서 무대에 올린 작품이다.나이 든 초로의 배우 지춘성이 34년 전 자신이 실제로 연기했던 극 속 인물 ‘도념’과 나누는 이야기와 감정들이 궁금했고, 잡념을 비우고 하나의 대상에만 정신을 집중하는 초월적 경지, 부처의 경지라고도 일컬어지는 '삼매경'이 왜 이 작품의 제목이 되었는지도 알고 싶었다. 배우가 누군가를 연기할 때 마치 그 인물 자체가 되어
108배를 시작했다. 식구들이 일어나지 않은 이른 아침, 긴 방석을 가져다 놓고 조용히 절을 한다. 마음에 집중하며 한 배 한 배 채우다 보면 어느새 108번째 염주 알 끝에 손가락이 닿는다. 이마에는 땀이 맺히고, 허벅지는 가볍게 당기지만, 마음은 든든하고 머리는 맑아진다.십여 년 전에도 한동안 108배를 했었다. 그때는 움직이는 몸에 집중하며 절을 했는데, 그것만으로도 정리되는 느낌과 새로운 기운을 얻었던 기억이 있다. 절이란 오체투지의 움직임이다. 몸의 다섯 부분 그러니까 두 손과 무릎, 머리를 땅에 놓으며 스스로를 낮춘다.
지난 주말 대구 간송미술관에 다녀왔다. 대구의 시립미술관으로 작년에 개관한 이곳에서는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문화유산을 상설 전시하고 있는데, 마침 첫 기획전이 열렸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게 됐다.다음 달 3일까지 열리는 ‘화조미감(花鳥美感)’ 전시는 제목 그대로 조선 민화 중 화조화를 시대별로 소개한다. 화조화는 꽃과 새를 주 소재로 그리는데, 이 두 가지 외에도 나무와 풀, 산과 강, 곤충과 동물들도 곳곳에 등장해 감상의 즐거움을 배가시킨다.전시 소개 글에 따르면 16~17세기에는 화조화에 문인의 이상을 담아 가치를 부여
“끝까지 하면은 된다는 말이 때때론/끝까지 틀리는 때도 때때론” 이무진이 부르는 ‘뱁새’라는 곡을 듣게 됐다. 직접 곡과 가사를 만들어 부르는 그가 이전 노래와는 다르게 ‘상실과 좌절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전달해 보고 싶었다’는 설명을 하는데 호기심이 생겼다.뱁새는 수십 마리가 무리 지어 사는 우리나라 전역에 서식하는 텃새인데 다리가 긴 황새처럼 눈에 띄는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지만 작은 몸체를 파닥이며 치열하게 사는 모습이 평범한 우리와 비슷해 자주 인용되는 조류다.최선을 다했지만 포기해야 하는 상황을 마주한 자신의 모습을 홀로 남
지난 회차에 이어 다시 제주 이야기다. 송악산 근처의 평화바람길 트레킹을 마치고 서귀포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바닷가 쪽으로 여러 대의 풍력발전기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2012년 제주는 2030년까지 탄소 없는 섬을 만들겠다는 ‘CFI2030(Carbon Free Island 2030)’을 발표했고, 바람 많은 제주에 적합한 풍력발전 중심의 에너지 자립 계획을 제시했다. 그래서인지 제주의 도로를 운전하다 보면 해안은 물론 산자락에서도 하얀색 대형 바람개비처럼 생긴 풍력발전기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그런데 그날 본 풍력발전
5월 28일부터 3일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평화와 번영을 위한 제주포럼(이하 제주포럼)에 참가했다. 다자외교 플랫폼인 제주포럼의 올해 주제는 '평화와 공동 번영을 위한 혁신'으로 외교·안보, 기후·환경, 경제, 교육·문화, 청년, 글로벌 제주 등 6분야 53개 세션이 진행됐고 전 세계 75개국에서 4900여명이 참가했다. 한국국제교류재단도 대한민국 청년세대가 참여할 공공외교의 방향과 과제 모색을 테마로 세션을 운영했고, 이를 위해 출장을 가게 됐다. 제주도, 국제평화재단, 동아시아재단이 주최하고 제주평화연구원이 주관하는 제주
“이건 작약이고, 저건 모란이네. 선배 두 꽃의 차이를 알겠어요?” 햇살 가득한 한옥 뒷마당에 핀 연분홍 큰 꽃을 바라보고 있던 나에게 후배가 말을 건넸다. “모란은 나무, 작약은 풀과에요. 그래서 모란은 대와 잎이 조금 더 두껍고 높게 자라고, 작약은 낮고 둥글게 펴요. 이파리도 반짝이고 하늘거리죠.” “이제 꽃도 잘 아네.” “요즘은 나무와 꽃을 찾아보면서 다니고 있어요.”지난 주말 이 좋은 5월을 만끽하자며 친한 후배 둘과 도시 산책에 나섰다. 편한 신발을 챙겨 신고 오전부터 만나 쉬엄쉬엄 걸으며 가보고 싶었던 곳들을 둘러보고
불기 2569년 부처님오신날이 지났다. 사무실이 을지로에 있어 가끔 점심시간에 조계사에 다녀오는데 이미 한 달여 전부터 형형색색의 초파일 연등을 만들고 거는 작업이 한창이었다.신실한 불자는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부모님을 따라 절에 다녔던 터라 누가 종교를 물어보면 불교라고 말하고는 했는데, 아닌 게 아니라 나이가 들수록 절에 가면 마음이 편해지고 제대로 공부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꾸준히 다니는 절이 있는 건 아니지만 여행을 가거나 산에 오를 때면 그 지역 절을 찾아 부처님께 삼배도 드리고 절 마당 이곳 저곳을 한동안 둘러보고
오십 대 중반이 되었으니 나는 어른이다. 여기에서 어른은 사전에서 정의하는 일반적인 의미인 성인(成人),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어른이라는 단어를 존칭으로 사용할 때는 ‘큰 사람(大人), 그러니까 말과 행실이 바르고 점잖으며 덕이 높아 존경받을 만한 사람을 가리킨다.흔히 요즘을 ‘어른이 없는 시대’라고 한다. 오히려 어른이라는 단어가 자신들이 살아왔던 때만을 기억하고 추억하며 강요하는 ‘라떼’ 집단이라는 느낌을 전하기도 한다. 나보다 앞서 살아온 이를 보면서 본받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게
나라 걱정하는 것 빼고, 요즘 지인들과 가장 많이 나누는 이야기는 드라마 (넷플릭스)다. 의 김원석 감독과 의 임상춘 작가가 함께하는 제주도 배경의 드라마라니, 거기에 아이유 박보검 문소리 박해준 나문희 김용림 염혜란 등의 배우를 한 화면에서 볼 수 있다니 기대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촬영 전부터 화제가 됐던 이 드라마는 한 달 전 방영을 시작했고 매주 새로운 화들이 올라올 때마다 사람들의 입을 타며 화제가 되었다. 작가는 가난으로 가족조차 돌보기 힘들었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시대, 어떤
“얼마나 더 많은 인생의 길을 걸어야 진짜 사람이 될까. 흰 비둘기는 얼마나 더 바다를 날아야 모래밭에서 편히 쉴 수 있을까. 전쟁의 포화가 얼마나 더 휩쓸고 지나가야 이 땅에 평화가 찾아올까.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 속에 있다네, 불고 있는 바람만이 알고 있지~” 밥 딜런이 부른 곡이었는지, 그와 존 바에즈가 함께 부른 곡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Blowin' in the wind 바람만이 아는 대답’에서 그가 연주하던 명징한 하모니카 소리는 언제든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렬했다. 이 곡이 담겨 있는 LP 커버 사진도 선
지난 주말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예능 프로그램 (MBC)를 보게 됐다. 방송인 기안84의 하루를 보여주는 내용이었는데 새로 옮긴 작업실에서 렘브란트의 화집을 뒤적이며 큰 캔버스 안에 빛을 그려 넣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필력을 높이기 위해 영감을 주는 작가들의 작품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방식으로 표현해 보는 중이라는 그는 얇은 붓으로 연신 바다 위를 비추는 빛무리를 만들어갔다. 잘하고 인정받은 웹툰을 계속하는 게 맞는 건지, 잘한다고 말하지 못하지만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는 게 맞는 건지 고민이라는 그는 자신의 나
25년 대입 정시의 충원 합격 등록 기간도 끝났으니 본격적으로 26년 대입이 시작된 셈이다. 그 말인즉슨 앞으로 1년간 우리 아이는 고3 수험생으로, 나는 수험생 엄마로 지내야 한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입학 후 지금까지도 아이의 컨디션은 괜찮은지 성적은 어떻게 나오는지 조심스러웠는데, 실제로 3학년이 되고 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부담과 긴장을 더 느낀다.엄마가 이 정도니 아이는 오죽하랴. 그래서 학교 선생님들이 학부모를 만나면 다른 것 신경 쓰지 말고 아이를 믿고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지켜봐 주고 격려해 주라고 당부하나 보다.그렇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