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미옥의 살다보면2]
죽을 만큼 힘들었던 일도
기억나면 힘든 일이 아니다란
최면술로 으랏차차!

2023년의 새해가 시작되었다. /게티이미지뱅크
2023년의 새해가 시작되었다. /게티이미지뱅크

지인의 일기장 같은 수필 책을 읽다가 크크 웃음이 터졌다.

어린 시절 동무들과 인간 줄다리기를 한다며 양 팀의 대표가 손가락을 깍지 끼워 잡고 당겼다. 이기겠다고 악다구니를 쓰느라 힘껏 잡아당기다 보니 앞세운 동생의 팔이 빠졌다. 동생은 아픔에 발버둥치며 울었는데 동생의 팔도 따라서 덜렁덜렁. 너무 놀라고 무서워 모두 난리가 났다. 그 후 동생의 빠진 팔은 어떻게 조치했는지 전혀 기억에 없다는···.

나도 어린 시절 갓 돌 지난 동생을 서로 업겠다며 언니랑 내가 아기의 팔을 잡아당기다가 아기 팔이 빠져서 덜렁덜렁, 엄마에게 호되게 맞고 동생의 팔은 어찌 되었는지 기억이 없다. 하하.  어린 나에게는 너무너무 무서운 사건이었나 보다.

초등학교 저학년의 기억도 거의 안 난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이듬해, 새엄마의 손을 잡고 학교에 갔다. 입학식 날 교실 문 앞에서 한복을 입고 허둥대던 엄마의 모습이 어색했다. 하교길 운동장에선 굉음을 내며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며(대구 동촌에 비행장이 있었다) 따라서 달리는 아이들에게 치여 넘어졌다. 그때 깔려 죽을 뻔했던 그날 이후의 초등 학창 시절은 끊어진 필름이 되었다.

쉰 살 즈음의 어느 날,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사람이 동창이라며 찾아왔다. 졸업사진 속 소풍 사진에 같이 찍힌 그는 입학식날 비행기 사건 이후의 멘붕도 어쩌고저쩌고 하며 들려주었지만 기억이 깜깜했다. 그날 나는 치매환자처럼 머쓱해서 미안해 어쩔 줄 몰랐다.  3종세트 같은 고독과 상실 그리고 가난이 어린시절에  아프게 지나간 것같다.

인간의 뇌는 때때로 너무 아프고 힘들었던 기억은 지워버린다. 그러니 우리 기억에 남아 있는 힘든 시간들은 기억 저편에 지워져버린 것보다는 덜 힘든 일인 셈이다.

요 근래의 일이다. 모임을 가면 매사에 자기 말만 옳다고 억지를 부리는 회원이 있다. 몇 사람이 남아 당연한 듯 그분 흉을 보며 뒷담화를 했다. 딸에게 그날의 이야기를 훈계하듯 말해 주었다. 삶에 성공한 사람은 겸손하고 언행도 조심해야 한다고. 그 말을 듣던 딸이 입을 삐죽 내밀며 대꾸했다.

“엄마 이야기 같은데~. 요즘은 아니지만. 호호”

헉, 돌려까기 하듯 말한 뜻을 해석하면 내가 더 고집이 세고 억지를 부렸다는 뜻이다.

문득문득 타인의 모습에서 종종 나를 만난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잘난 척하며 소통의 부재로 살았을까? 자신의 잘못은 기억 없다 생각 안 난다 외면하고 고집과 억지를 부리는 것도 어른이 아닌 노인이 되어 간다는 뜻이다.

평온한 일상은 신의 가호가 있어야 주어지는 선물이다. /게티이미지뱅크
평온한 일상은 신의 가호가 있어야 주어지는 선물이다. /게티이미지뱅크

불교용어에 보면 ‘명훈가피(冥勳加被)'라는 말이 있다.

언젠가부터 그 말이 내 마음에 들어왔다. 딱 부러지게 느낄 수 없지만 자기도 모르게 우주의 신비한 보호를 받는다는 뜻이란다. 날이면 날마다 갖가지 기기묘묘한 사건사고가 터지는 세상에서 온전하게 집으로 퇴근해서 돌아오는 거란다.

그리 생각하니 다사다난하고 험난했던 시간을 보내고 새로운 2023년을 맞은 나도 그 은혜를 받은 거다. 지난 한 해도 잘 살았다. 아직도 가끔은 고집과 억지를 부리는 노인의 일상이지만 늘 반성하고 감사하며 부정보다는 긍정 마인드로 살려고 노력한다.

가족이란 살아가는 모든 것의 울타리고 힘이다. /게티이미지뱅크
가족이란 살아가는 모든 것의 울타리고 힘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어제는 ‘아바타’라는 영화를 보았다. 영화 속 화려한 세상에서도 삶은 죽을 만큼 힘들다. 산다는 것은 피하지 않고 부딪쳐 앞으로 나아가는 일,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2023년 새해에는 더 힘들 거라고 모두들 말한다. 가족이라는 든든한 울타리와 '명훈가피'를 소확행으로 간직한다면 올해도 우리는 신의 보호를 받는 셈이다. 힘들었던 기억은 모두 잊어버리고 다시 신발끈을 단단히 묶어 일어선다. 일어서서 걷기 시작하면 앞으로 나아가지 뒤로 가진 않는단다. 오늘도 찬란한 아침을 맞이하고 다시 평온한 저녁을 맞이한 것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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