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미옥의 살다보면 2]
남편 병구완 탓에 소홀했던 자식들
잘 살아주는 모습에 늘 미안한 마음
열심히 살았으면 그걸로 만족하자
월요일 아침, 편찮으신 이웃어른을 병원에 모셔드리고 돌아와 드라마를 본다. 죽음을 앞둔 엄마와 방황하며 자란 아들의 대사가 가슴을 울린다. 삶이 외롭고 힘들었던 중년의 아들이 엄마에게 대들며 말한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냐고? 죽기 전에 나한테 왜 미안하단 말 한마디 안하냐고? 무엇이 그리 당당하냐고? 무표정한 엄마의 담담한 말 한마디가 화살처럼 가슴을 쏜다.
“내가 왜 너한테 미안해야 하니?“
그러게, 나역시 참 열심히 살았는데. 미안할 이유가 없는데. 왜 자식 앞에선 늘 미안하단 말이 나오는지. 문득 시골 살면서 만난 어르신이 생각났다.
남편이 병을 얻어 시골 행을 택했을 때 20대에 들어선 아이들을 두고 남편 따라 내려오느라 우리 가족은 갑자기 이산가족이 되었다. 아이들이 걱정되어도 자주 가 볼 수 없던 시간, 허전한 마음 풀 곳이 없어 불쑥불쑥 찾아가 엎어져 울다가 오곤 했던, 내겐 부모님 같은 분이다.

아이들이 직장과 학교를 다니며 스스로 의식주를 해결하고, 힘든 청춘을 보냈으면서도 결혼도 하고 잘 살아주니 늘 미안하다 하면 그냥 "참 잘 컸구나"하고 기특한 마음만 가지라 하셨다. 절대로 미안해 하지 말고, 떳떳하게 살라고 기 세워 주셨다.
갑자기 뵙고 싶은 마음에 한 시간 거리를 달려왔더니 두 분 다 안 계시다. 호미와 꽃모종이 마당에 어질러진 걸 보니 방금까지 계셨던 모양이다. 전화를 몇 번이나 해도 불통이다. 얼마 전엔 뵈었을 때 가끔씩 어지럽다고도 하셨는데 쓰러지셨나?
두 분 모두 60대에 암 선고를 받고 사는 날까지 자연을 벗 삼아 살고자 이 산골에 들어오셔서 80대 중반에 이르셨다. 서로 격려하고 의지하며 살아오신 인고의 세월, 언제나 떠날 준비가 된 듯 안팎에서의 깔끔한 매무새는 늙는 게 아니라 곱게 나이 든다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를 알려주셨다.
힘든 우리에게 큰 힘이 되어주실 때 두 분이 돌아가실 때까지 자주 찾아뵙고 부모님처럼 모시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어디로 가고 내 필요할 때만 전화하는 못난 이웃이 되었다. 너무 오랜만에 찾아온 것 같아 마음이 어수선하다.
집에 돌아와 멍하니 달력을 보니 오늘이 아들의 생일이다. 그래서 아침에 전화한 건데 바쁘다며 끊었으니 참 무심한 엄마다. 아무렴 각자의 시간을 충실하게 살면 되는 거라는, 당당하던 의지가 아들이 보낸 문자 한 통에 무너진다.
“오늘 내 생일이라고 받은 선물이 산더미지만 말이야. 편찮으신 이웃어른 모시고 급히 병원 가는 중이라는 아침 통화에, 우리 엄마 건강한 일상을 상상해보는 그것보다 더 행복하고 감사한 선물이 없지요. 낳으시고 키우느라 고생하신 엄마 늘 감사합니다.“
어쩌랴, 드라마는 대리만족일 뿐. 문자를 받는 순간 그들을 향한 나의 행동은 굽신 모드다. 잘 살아줘서 고맙고 또 미안하단 답장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늦은 저녁에 어른에게서도 전화가 왔다. 이웃의 점심식사 초대에 마당에서 일 하다가 차에 태워지는 바람에 폰을 두고 가셨단다. 죄송하고 미안하다는 나의 말에 나무라듯 말씀하셨다.
미안함이 쌓이면 떳떳함이 사라지고 지은 죄도 없이 비굴해진다고. 자신의 자리에서 잘 살다가 행여 우리가 먼 길 떠났다는 소식을 들어도 '그렇게 갔구나. 잘 갔구나'하고 이해하란다. 이해하면 마음에 평화가 오고, 판단하면 마음이 전쟁을 친다는 말도 덧붙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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