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미옥의 살다보면2]
풀 한 포기·지나가는 사람들
모두가 주인공이 된다
도서관의 모든 책은 글 스승

살다 보면 누구나 삶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갈 때가 있다. 내 인생의 터널은 너무 길고 지루해서 그 끝이 있긴 할까 문득문득 생각하곤 했다. 그때 나를 버티게 해준 것이 글쓰기다. 돈 안 드는 취미로는 최고였다. 뚜렷한 분야도 없는 잡글이 시가 되었다가 수필이 되었다가 다큐 시나리오도 되었다.
그 취미가 고령인에 합류된 요즘 재밌는 일상을 만들어준다. 돈벌이 글이 아니고 등단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몇 군데 청탁 글을 부담 없이 즐기며 쓴다. 열등감, 자존감, 경쟁 이런 건 조금이라도 비슷한 순위에서나 비슷한 환경이라야 할 수 있는 거라, 도서관에 꽂힌 모든 책을 스승 삼아 흉내 내다 보니 글쓰기가 재밌다. 혼자 놀게 만들어 주는 놀잇감이다.
사대천황(양쪽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지인은 만나기만 하면 나에게 글감을 준다. 우리 나이가 벌써 60대 후반이 되었으니 형제의 중간이거나 막내의 부모님은 거의 백수를 바라보신다. 집 떠나지 않은 자식이 있고 거기에 부모님도 함께 살면 삼시세끼 걱정과 소통의 부재에 치여 먼저 압사당할 판이다. 주인공은 샌드위치가 된 본인인데 부모님도 중년의 자식도 백 년 시간의 울타리 안에서 모두가 갑이고 주인공이다.

오늘도 한 지인의 이야기에 모두 허무하게 웃었다.
조심조심했지만 온 가족이 코로나에 걸려버렸다. 100세가 다 되어가는 시어머니도 걸렸다. 어른만 열이 심하게 올라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어머님이 이렇게 삶을 마감하나라는 생각에 울컥울컥 눈물이 났다. 코로나에서 먼저 풀려난 자식들이 병원 문 앞을 서성이며 기도했다. 시어머니는 중환자실을 벗어나 20일 만에 퇴원했다.
"아직 세상에 남아 좋은 일 하라고 신이 기회를 주신 거 같다."
그녀가 기쁜 표정으로 하늘을 우러러 말씀하셨다. 어머니의 뒤를 따르던 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형님, 엄마는 기회를 놓친 거야. 그쵸?”
웃고 있지만 눈물 나는 이야기다. 우리가 모여 떠드는 주제는 매번 같다. 그렇게라도 속풀이를 하고 집에 돌아가면 한참을 다시 잘 지낼 수 있단다.
김호연 작가는 사는 것과 글쓰기는 같은 모습이라 했다. 쓰기, 고쳐쓰기, 마감이 그러하다. 사대천황 부모님도 붙박이 자식 놈도 기록자의 눈으로 보면 역사를 만드는 특별한 인물들이다. 내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두 사람 다 유명 대학 문예창작과, 국문과를 나온 어른인데 대가족을 아우르며 일촌광음의 속도로 정신없이 산다. 대신 전문적 학습은 물론 아무것도 아닌 나를 기특하게 바라보며 대리만족하듯 ‘송 작가’라 불러준다.
기회를 놓쳐서라도 오래 살고 싶은 세상이다. 그러려면 건강이 첫째다. 돈 안 드는 취미로 글쓰기를 추가하면 노후엔 금상첨화다. 가끔은 나도 종일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다. 공터 곳곳에 운동기구와 도서관이 많은 나라가 우리나라다. 많은 어른이 아침마다 출근하듯 집을 나서서 도서관을 향한다. 그날의 강의를 듣거나 책을 읽다가 잠깐씩 운동을 하시며 휴식을 취한다. 머리가 하얀 한 어른은 두꺼운 책 한 권을 놓고 필사를 하는데 다 끝나려면 몇 년이 걸릴 것 같다. 그 모습이 멋지고 존경스럽다.
문득 재밌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피아노를 배우려는 나이 든 어른에게 젊은 사람이 비웃듯 물었다.
“지금 시작해서 잘 치게 될 때면 나이가 얼마나 될까요?” 어른이 대답했다.
“나이가 많이 들어있겠지요.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해도 살다보면 그 나이가 된답니다.“
요즘 읽은 ‘나의 아름다운 정원’ ‘불편한 편의점’ 등은 내게 글쓰기와 심리학을 가르쳐준 소설이다. 이런 좋은 책을 읽다 보면 가끔 욕구가 솟구친다. 마음에 없다던 신춘문예도 몰래 또 도전해 보고 싶다. 열심히 쓰다가 어느 날 죽더라도 유고작이라며 아이들이 책 한 권씩 만들어 유물로 간직할지, 최고령할머니로 등단했다는 내 이름 석 자가 신문 자락에 휘날릴지 흐음···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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