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미옥의 살다보면2]
어른이라고 너무 멀리 세우지 말기
함께 해 주면 좋겠구만
딸이 학교 급식용 우유를 한 박스 갖다 놓았다.
방학을 맞아 코로나로 학교에 가지 못한 일수를 계산해 일괄 분배한 모양이다. 노인들은 우유보다 두유가 좋다고 해서 받아먹던 우유를 끊었는데 설득력 있게 말 잘하는 지인이 또 우유 예찬을 했다. 내 귀가 팔랑팔랑, 다시 우유를 먹기 시작했는데 한 박스씩이나, 거기에 혼자서도 잘 챙겨먹는 내가 쑥스럽다.
남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챙긴다지만 죽음은 두려운 것, 건강만큼은 '적당'이 없다는 것을 느낀다. 몸에 좋다고 하면 팔랑귀가 되고 양잿물도 마실 판이다.

방학을 맞아 손자들이 왔다. 이제 컸다고 개구리 뛰고 잠자리 날아다니는 넓은 마당은 눈길도 안 주고 직진하더니 방 한구석에 틀어박혀 각자 폰과 논다. 그러다가 따로 또 같이 쥐방울 드나들 듯 냉장고문을 열고 닫으며 유령놀이 하듯 나를 스쳐 다닌다.
모든 게 세상 탓이라지만 한창 뛰어놀 나이인데 공부에 시달리느라 친구도 없고 못 따라가는 머리에 주눅 들며 살아가는 아이들이다. 배드민턴을 칠까 물으니 피곤해서 쉬고 싶단다. 내가 자꾸 공부 잘하고 있냐고 물어서 애써 외면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억지로 끌고나와 동네 한 바퀴를 도는데 입이 열댓 발씩 나와 있다.
냉장고에 아껴 먹던 우유가 다 사라지고 빈 곽만 쓰레기통에 쌓였다. 나도 아이들도 들락거리며 고양이만 안아주니 그 녀석은 아예 현관에서 기다린다. 고양이 밥그릇에까지 우유가 부어져 있다. ‘얘들아 나도 외로브야.’ 그대가 옆에 있어도 외롭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웃프다.
딸 부대가 철수한 후, 아이들이 너무 피곤해하니 학원을 줄이라며 다른 꼬투리에 낚시를 걸어 문자를 보낸다. 딸 왈, 제 아이들은 학원은 안 보내고 센터만 보낸다는 너스레 답장이 온다. 학습센터, 문화센터, 체육센터 등등 학원보단 학습 등급이 낮다지만 이래저래 피곤하긴 마찬가지다.
며칠이 지난 오늘, 아이들을 끌고 시댁에 다녀온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들으나마나 고만고만한 사촌들이 모여 휴가를 즐겼으니 그네들의 뒷담화일 거다.
그런데 목소리가 고해성사 모드다.
"엄마, 엊그제 속상했지? 애들 먹는 거 가지고 그러냐고 눈치 줘서 미안해. 오늘 시어머님이 엄마랑 비슷한 말씀을 하시는데 문득 깨달음이 왔어.
'그 많은 옥수수랑 얼음과자를 한 개도 안 남기고 다 먹었구나. 맛있더냐?' 하시며 무언가 섭섭한 표정이셨어. 가만히 생각하니 그 많은 걸 다 해치우면서 어른도 아이들도 '할아버지, 할머니 먼저 드셔요~ 아버님 어머님 같이 드실래요?‘라고 한 번도 안 여쭤 본 거야. 엄마도 그래서 속상했지? 미안 미안해. 주절주절.“

내 어릴 적만 해도 귤 한 개를 갖고 너 한쪽 내 한쪽 하며 서로 나누고 나머지가 생기면 으레 가장 어린 막내부터 다시 돌며 화기애애했다. 귤 한 개로도 작은 공동체가 사랑으로 뭉쳐지곤 했다.
변하는 세상에 휩쓸려 우리세대부터 자식들을 독불장군 외톨이로 키워놓았다.
그러나 사람 사는 세상은 아무리 최최첨단 시대로 변해도 대화 즉 소통이 기본이라 한다. 뒷담화가 인간의 역사를 만들었다고 하지 않던가. 언감생심 어른공경이니 어른먼저니 그런 건 바라지 않은지 오래다. 멀찍이 떨어져 있더라도 먹는 자리에서 만큼은 “할머니 이거 같이 먹어요” 말 한마디 건네며 끼워 주기를 희망한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우유 하나 안 줘서 삐친 게 맞았다.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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