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미옥의 살다보면2]
"죽음을 준비하기엔
암이 그나마 나을지도···"
어느 의사의 말이 생각나

남편은 군위에 있는 산꼭대기 아파트에서 우리를 지켜보고있다. 군위 천주교 묘원 /사진=송미옥
남편은 군위에 있는 산꼭대기 아파트에서 우리를 지켜보고있다. 군위 천주교 묘원 /사진=송미옥

오늘은 추석이지만 남편의 기일이기도 하다.

제사를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실행시키려고 그랬는지 추석 다음날 떠나는 바람에 추석날은 먹거리의 풍요함은 물론이고 잊을 수 없는 기념일이 되었다. 처음엔 힘들어 하던 남편은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잘 죽겠다는 계획을 원대(라고 말하기엔 겸연쩍기도 하지만)하게 세웠으며 그런대로 잘 마무리해 냈다고 생각한다. 그의 삶을 통해 남아 있는 나도 시간을 어떻게 정리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깨달았다. 욕심을 비우고 또 비우며 즐겁고 알찬 하루를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말기암이라 해도 요즘은 잘 다독거리며 함께 지내다 보면 거의 천명(天命)을 따라 살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뉴스를 보며 강력 태풍이 지나간 재해 소식에 슬픈 드라마를 보듯 마음이 아프다. 지하주차장에서 빠져나가지 못할 상황이 오자 아픈 엄마가 어린 아들을 돌려보내며 ‘너만이라도 살아 남아다오‘ 하며 작별인사까지 했지만 엄마는 살고 어리고 착한 아들은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그러고 보면 삶이란 내 의지로 살아지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가난했던 우리는 치열하게 달리기 하듯 살았다. 간암 진단을 받자 남편은 아이들을 불러 앉히고 휴양 차 잠시 시골로 내려간다고 조용히 말했지만 속마음은 허무하고 아팠다. 이제 좀 사는 것 같이 살아보려 하니 죽으라 한다며 신을 향한 분노의 광기가 하늘을 찔렀다. 그는 모든 치료를 거부하고 산으로 들어갔다. 주말부부로 살기로 했던 나도 엉겁결에 아이들을 두고 따라 내려가 함께하게 되었다.

지금도 정신없이 몰아치던 일 년 간의 사건 사고를 생각하면 웃프다. 빈집 고쳐 들어가 열흘 만에 군불 때다가 전신 화상을 입어 병원 입원, 보름 후 퇴원. 말벌에 쏘여 혼수상태로 119로 후송(그 당시엔 못 깨어날 수도 있으니 의사는 나에게 준비하라고 했다.), 이틀 만에 깨어나 극적으로 퇴원. 놀러온 지인들과 집 뒷산을 돌다가 땡벌에 쏘여 넘어지면서 머리를 다치고, 술 마시고 귀가하다 캄캄한 밤에 발을 헛디뎌 집 앞 다리에서 낙하했다.

함께 한 친구들이 그가 죽었다고 울부짖으며 쫒아오고, 자다가 놀란 나는 가로등도 없는 캄캄한 밤을 내달리며 플래시를 비추니 남편은 스파이더맨처럼 개천 둑을 엉금엉금 기어오르고 있었다. 지인들이 되레 놀라 넘어지며 심장마비로 죽을 뻔했던 그날의 사건은 함께한 지인들과의 만남이 있는 날이면 안부가 되었다.

어느 날은 비포장도로의 좁은 벼랑길에서 차가 논으로 굴렀다. 반파된 차를 견인해가서 일주일 만에 고쳐오다가 다시 전봇대를 박아 완파가 되었다. 거짓말 같은 그 모든 일이 1년 동안에 다 일어났는데도 그는 안 죽었다. 간암은 가만히 누워있어야 한다는데, 그래도 죽는다는데, 움직이다 보니 살아졌다. 병으로 인해 병원을 찾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죽을힘을 다해 용을 써도 하늘의 결재 없인 절대로 못 죽는 거였다.

 

산속에 방치된 외딴집 /사진=송미옥
산속에 방치된 외딴집 /사진=송미옥

조용하던 작은 동네에 외지인이 들어와 일으킨 사고는 큰 뉴스 거리였다. 뒷담화가 동네를 달구었다. 온갖 위험에서 살아남은 거니 이구동성으로 고사를 지내라고 했다. 집 귀신을 달래놓고 이사부터 하라며 산 아래 빈집도 알아봐 주었다. 우리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막걸리로 술 한 잔을 올리며 고사를 지낸 후 차를 폐차시켰고 1년 만에 동네사람들이 소개해 준 또 다른 빈집이 있는 깊은 산속으로 이사를 준비했다.

그땐 몸도 마음도 암보다 더 큰 아픔은 없으리라 생각했었다. 정신없이 살다보니 암이 걸린 건 뒷전이고 사고가 안 나길 기도하는 나날이었다. 문득 ‘완전히 방치할 수만 있다면 죽음을 준비하기에는 암이 최고’라고 말한 어느 의사의 말이 생각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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