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미옥의 살다보면2]
나이 들어 일률적이고 규칙적인
생활이 때론 허무라 해도···

무엇이든 배우려는 자세가 좋다. 진도가 안 나가도 행복하다. /게티이미지뱅크
무엇이든 배우려는 자세가 좋다. 진도가 안 나가도 행복하다. /게티이미지뱅크

오늘도 여지없이 아침부터 푹푹 찐다. 나는 주 3일 근무 후 남는 시간 중 화요일은 거의 종일 복지관에서 산다. 이곳은 여가 활동공간과 품격을 더하는 온갖 무료 학습, 그리고 저렴하게 제공하는 복지식당도 있다.

오전에 수업 한 개 듣고 점심을 먹고 오후에 또 한 수업 들은 후 두 시간 정도 독서를 하다가 6시에 귀가하는 루틴이다. 어떤 이는 노인네 유령 놀이라고 폄하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일수 도장 찍듯이, 참새 방앗간 출근하듯이, 가방을 둘러메고 집을 나선다. 아무튼 바쁜 아침이다.

오전 첫 수업은 10시인데 나는 9시 전에 집을 나선다. 부지런히 달려 복지관에 들어서면 나보다 먼저 도착한 사람이 수두룩하다. 우리를 뛰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그것은 9시 10분부터 발권하는 이천오백원짜리 식권 구입을 위함이다. 200명까지 제공되는데 맛도 영양도 푸짐하니 아슬아슬하게 끊기면 너무 아쉽다.

그렇다고 더 일찍 나와서 줄 서 기다리기엔 이천오백원에 목매는 거 같아 폼이 안 난다. 식권 타기에 성공하면 마음도 시간도 느긋해져서 삼백원짜리 자판기 커피를 서로 빼주며 여유를 부린다.

복지관에서 나오는 점심은 최고의 맛집이다. /게티이미지뱅크
복지관에서 나오는 점심은 최고의 맛집이다. /게티이미지뱅크

내가 듣는 오전 수업은 영어 회화. 교실에 들어서면 식권 구입 성공 여부를 시작으로 그간의 안부를 주고받는다. 일주일이면 수박 넝쿨이 2미터는 넘게 나가는 뜨거운 여름날, 이야기 넝쿨도 나이만큼 풍성한데 영어는 넝쿨이 안 나간다.

평균 연령이 70대 중반, 영어를 배워 해외여행을 가기보다는 화요일 오전이라는 시간대에 맞춘 그냥 수업일 수도 있다. 모두 고학력자들이라 책도 술술 잘 읽고 번역도 기똥차게 하는데 대화가 영 안 된다. 텃밭을 일구시는 분들이 많은지 살구, 참외 같은 과일부터 삶은 감자, 옥수수 등등 출석하는 학생들의 손에 들린 먹거리 덕분에 말 못 해 소심한 입이 그나마 즐겁다.

식권 구입 쟁탈전을 끝내고 일찌감치 착석한 학생들 모습이 수업 열의 때문이라 생각하신 젊은 외국인 선생님은 크게 고무되어 오늘도 양손에 간식을 들고 함박 웃으며 들어오신다.

2시간 수업은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선생님이 영어로 질문하면 영어로 대답해야 하지만 Oh~No~, 선생님이 오히려 어려운 한글과 사투리를 배워 가신다. 오전 수업 후 맛있는 점심을 먹고 나면 다시 2시부터 오후 수업(나는 어반 스케치반)이 있는데 그 수업이 지난주에 먼저 종강했다.

그래서 오늘은 바로 집으로 가느냐? 이것도 No~. 수업이 없어도 노래방, 헬스장, 영화관, 도서관, 탁구장 등등 지하부터 5층까지 이어진 무료 여가 공간이 우리를 붙잡는다.

매주 화요일 오후는 영화 상영하는 날, 뭐든지 볼 준비가 되어 있으니 영화 제목은 별로 중요하지 않지만, 오늘 상영작은 <하얼빈>. 보고 싶었던 영화다. 남는 시간을 이용해 헬스장에서 가벼운 운동을 하고 느긋하게 자리를 찾아 앉는다.

배도 부르고 근육도 풀고 나니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눈이 솔솔 감긴다. 앞자리 머리들이 하나둘 총 맞은 것처럼 꺾이더니 오징어처럼 말린 등짝이 보인다. (잠은 누워서 자야지 품위 없게스리. 쩝)

잠시 후 영화가 시작된다. 아무도 안 일어난다. 옆에 앉은 친구나마 깨우려다가 애잔해서 그냥 둔다. 화면에선 귀가 울릴 만큼 대포가 터지고 총을 쏘고 사람이 죽고 난리지만 그 모든 난리를 이기는 건 눈꺼풀이다.

기승전결 중 앞부분이야 졸았지만 그래도 뒷부분만큼은 열중한다. 영화가 끝나고 모두 뿌듯한 애국심에 고취되고 흥분되어 당당하게 문을 나선다. 그런데 사돈남말한다더니 친구의 황당한 귓속말에 웃음이 터졌다.

“이그~ 넌 어제 밤엔 뭐하고 그리 곤히 자냐. 코까지 골더라니.”

지역마다 있는 노인복지관에는 운동부터 취미생활까지 도와주는 별별 수업이 다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지역마다 있는 노인복지관에는 운동부터 취미생활까지 도와주는 별별 수업이 다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누군가는 어른들의 대책 없이 규칙적인 일상이 내면에 숨겨진 허무의 모습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리 생각 안 한다. 오늘 하루 200번 밥표를 사수하기 위해 허둥지둥 달리고, 외국어 한마디 하기 위한 소심한 긴장감도 노년의 질을 적당히 높여준다고 믿는다. 

불안하지 않은 삶, 끼리끼리 함께 어울리고 먹고 대화하며 기웃기웃 사부작사부작 돌아다니는 내 모습이 허무를 등에 업은 유령 놀이라 해도 오늘 하루 즐겁게 잘 살아낸 나를 꼭 안아준다. ‘송 여사의 슬기로운 한여름 생활을 응원합니다.’ 딸이 보낸 문자에 행복을 더한다.

여성경제신문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sesu32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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