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미옥의 살다보면2]
눈에 보이지 않아도
대단한 힘을 가진 것들

봄에 피는 꽃은 수명이 짧아서 날씨가 궂으면 하루살이가 되기도 한다. 튤립도 그렇다. /게티이미지뱅크
봄에 피는 꽃은 수명이 짧아서 날씨가 궂으면 하루살이가 되기도 한다. 튤립도 그렇다. /게티이미지뱅크

봄꽃은 투정하는 사춘기 아이처럼 홀짝 폈다가 삐친 듯 금세 시들어 버린다. 올해는 대형 산불에 혼이 나가 마당을 소홀히 한 것도 이유가 되겠다.

이전에 살던 곳에서 물난리를 크게 겪은 적이 있다. 이보다 더 처참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재난에 등급은 없는 것 같다. 인재로 시작되었지만 미친 듯이 부는 바람이 키운 시뻘건 불 괴물이 연일 종잡을 수 없이 방향을 바꿔가며 산천을 집어삼키는 광경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다가 멍하니 생각이 멈추었다. 연이어 들려오는 집이며 농작물을 잃은 지인들의 피해 소식에 자꾸 허방을 짚는 듯 기운이 달리고 헛헛했다.

가뜩이나 가속 소멸하는 지방에 이리 큰 재난을 당하니 지역경제는 폭삭 주저앉을 판이다. 어느 드라마의 대사처럼 아무리 힘들어도 함께 어울려 살다 보면 살아진다고, 봄나들이 여행으로 이왕이면 안동으로 와주시면 그게 곧 기부라는 공익 광고가 가슴을 저리게 한다.

봄이 어떻게 왔다가 가고 있는지 마음 쓰지 못해 방치해 둔 마당을 무심히 돌아보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세상에나, 언제 이리 꽃을 피웠나!”

몇 해 전에 마당 한 귀퉁이에 노랑 빨강 각각 다섯 포기 튤립을 심었다. 작년에 노랑 열다섯, 빨강 둘로 꽃대를 피워 올려 의아해했는데 올해는 황제의 대관식과 경축 사절단이라도 되는 듯 열아홉 송이 빨강과 달랑 한 송이 노랑 왕관이 고고하게 고개를 치켜세운다.

어수선한 마음 핑계로 정작 조그마한 내 집 밭의 생명조차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미안함이 가득한데 게으른 집사를 위로하듯 이리 빛나는 튤립 대관식을 연출하다니, 그 생명력이 고마워 울컥해졌다. 이곳저곳 저 나름대로 살아 낸 초록이들을 보며 서성거리자니 지나가던 낯선 차가 속도를 줄이고 멈춰 서서 한마디 한다.

“마당이 예뻐요. 저도 이렇게 살고 싶어요. 참 잘 가꾸셨네요.”

스스로 용을 쓰며 꽃피웠더니 공로상은 엉뚱한 인간이 받은 격이다. 그 말이 민망하면서도 고마워 여기저기 봄나물과 푸성귀를 솎아 다정한 이에게 듬뿍 안겨 주었다.

나는 불편해서 거의 따라가지 않았던 텐트 숙박 여행이 아이들에겐 큰 추억을 만들어 준 것 같다. /게티이미지뱅크
나는 불편해서 거의 따라가지 않았던 텐트 숙박 여행이 아이들에겐 큰 추억을 만들어 준 것 같다. /게티이미지뱅크

호주 사는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폰을 건네받은 손주의 목소리가 풍선에 매달린 듯 경쾌하다. 분기마다 있는 방학을 맞아 아이들이랑 여행가는 길이란다.

“엄마 우리 어릴 적 너무 가난하여 두 분은 죽기 살기로 일만 하던 시절 기억나? 그때 주말에도 일해야 한다는 엄마를 남겨두고 아버지는 우리를 빼내 여행 다녔잖아. 수용소 탈출하듯 말이야. 아빠하고 있으니 엄마 잔소리도 안 무섭고, 좁은 텐트에 셋이서 끼여 깔깔대면서, 텐트 위로 퍼붓던 소나기 소리 듣고... 수영도 배우고 고기 잡고 토끼도 잡고... 잘 자라는 내 아이들을 보면 문득문득 아빠가 보고 싶어 눈물이 나. 웃기지. 생각해 보면 참 가난하고 추웠던 시절이었는데... 하나도 힘들지 않았던 것 같아. 무척 고맙고 감사해.”

아버지와 함께한 어린 시절의 소소한 추억들이 힘들고 지칠 때 너만의 화수분이 되어 주나보다. 죽을 만큼 아픈 기억들도 같이 보듬고 헤쳐 가다 보면 그 눈물이 별처럼 빛나게 되나보다.

요즘은 풍선아트를 쉽게 배울 수 있어서 이벤트나 작은 파티엔 직접 꾸밀 수 있게 온갖 모양의 풍선이 다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요즘은 풍선아트를 쉽게 배울 수 있어서 이벤트나 작은 파티엔 직접 꾸밀 수 있게 온갖 모양의 풍선이 다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지난겨울, 은박지별이 가득 든 파티용 풍선을 잔뜩 사서 벽 한쪽을 장식했었다. 멀리서 오는 아들네를 환영하며 준비한 나름의 의식 도구(?)였다. 겨울이 가고 파티가 끝난 지 오래되었건만 여전히 팽팽한 숨을 유지하고 발코니 한구석을 지키고 있었다.

봄바람 세차게 부는 오늘, 우당탕 소리에 밖을 내다보니 테크 난간에 놓인 의자가 날아가 마당에 처박혔다. 오늘 바람은 무지막지한 폭풍 수준이다. 무심코 발코니 문을 열자 탈출을 꿈꾸던 빠삐용처럼, 아니 꽁지에 불붙은 로켓처럼 풍선들이 떼 지어 붕붕 하늘로 올랐다. 어머머~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공중에서 하나둘 터져버려 풍선 가족의 탈출 작전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나 싶더니, 세상에나! 풍선에서 또다시 별들이 탈출한다. 별이 쏟아져 내린다. 마당이 별들로 반짝인다. 정말 아름답다. 사진을 남기고 싶어 폰을 들고나오니 그새 별들도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하아! 입을 벌리며 우연히 얻은 감상도 잠시, 변덕쟁이 할매의 푸념이 튀어나온다.

“마당에서 터졌으니 망정이지 방에서 터졌으면 어쩔 뻔했냐고오...”

주절주절 구시렁구시렁하며 웃다 보니 가슴을 짓누르던 묵직한 기분도 사라진다.

보이지 않는 바람과 보이지 않는 생각, 꿈 같은 기억들, 그 힘은 정말 위대하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라는 폴 발레리의 시구절이 오늘따라 자꾸 생각나는 하루다.

여성경제신문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sesu32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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