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미옥의 살다보면2]
내 노년의 버킷리스트 '다른 세상 걸어보기'
아들 가족의 고국 방문에 밀릴 뻔했지만
내면 읽어내는 친구의 격려에 올해도 성공

건강검진은 가끔 건강한 사람도 소심하게 만든다. /게티이미지뱅크
건강검진은 가끔 건강한 사람도 소심하게 만든다. /게티이미지뱅크

이모같이 정다운 이웃 어른이 건강 검진을 받은 후 얼굴빛이 어둡다.

그는 고령이지만 얼마나 바지런한지 신체 나이는 나보다 더 젊으시다. 결과지 소견란에 적힌 ‘죽상동맥경화의심‘이란 처음 듣는 병명에 정밀검사까지 요한다니 표정이 죽상이 되어 건강하던 몸이 여기저기 아파온다. 그가 시집와서부터 드나들었다는 단골 의원에 모시고 갔다. 의사 선생님도 긴 세월을 함께하며 같이 늙으셨다.

’나이 들면 모두가 비슷한 병명 하나씩 갖고 있다. 이 또한 건강관리만 잘하면 죽을 때까지 아무런 증상 없이 산다, 잘 먹고 운동 잘하고 잠을 푹 자면 아무 문제 없다.‘

이런저런 예를 들어가며 조곤조곤 설명하면서 등을 토닥이신다. 그래도 그는 미심쩍어 며칠 밤을 죽을병 걸린 듯 뒤척였다. 걱정된 자식들이 바로 서울로 모시고 가 재검사를 하니 큰 병원 의사도 똑같이 말하더란다.

그의 얼굴이 다시 환하게 밝아졌다. 그런데 시골 의사가 서울 의사보다 똑똑하고 훌륭하다고 추켜 주다가도 가끔씩 병원이 도둑놈이라며 욕을 한다. 손자며느리 주려고 꼭꼭 모은 쌈짓돈을 순식간에 날렸으니 말이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니 보따리 내놓으라 한다더니 참나··· 만나면 꺼내는 몇 번의 재방송도 그냥 웃어넘긴다.

자동차에 대해 잘 모르면 단골 정비소를 정해 자주 사전 정비를 받으면 좋을 것 같다. /게티이미지뱅크
자동차에 대해 잘 모르면 단골 정비소를 정해 자주 사전 정비를 받으면 좋을 것 같다. /게티이미지뱅크

내게 일어난 오늘 일도 비슷하다. 몇 달 전부터 차에 시동을 켤 때마다 걸걸거리는 소음이 났지만 그 소음도 오래 듣다 보니 그러려니 하고 다녔다. 아침에 출근하려는데 갑자기 시동이 불안정해서 AS를 신청했다.

견인하러 온 기사가 보닛을 열어보더니 차가 고장 점검 신호를 보냈을 텐데 몰랐냐며 무안을 준다. 오래 방치해 중병이 났으니 제너레이터와 벨트 교환 및 전반적인 재정비가 필요하단다. "소리가 너무 작게 들리니 몰랐지"하고 미안한 마음을 담아 차에 툴툴댄다. 호미로 막을 일 가래로 막는다는 말이 나를 두고 한 말 같다.

12월엔 호주에 사는 아들 가족이 온다 해서 어떤 음식을 만들까, 어떤 선물이 좋을까, 그들을 만날 기대와 선물 고르는 재미로 즐거웠는데 엉뚱한 곳으로 뭉칫돈이 도둑맞은 듯 빠져나가니 기분이 다운된다.

내 노년의 목표 중에 ‘다른 세상 걸어보기’를 적어놓고, 60세부터 적극적으로 시작했다. 몇 년 전 보스의 지원에 힘입어 ‘살아보기’를 해도 될 만큼 시간이 여유로워졌다. 올해는 그 계획이 ‘아들 가족 고국 방문’이라는 프레임 뒤로 밀린다. 누가 보면 아들이 두 달간 나를 구속한 줄 알겠다. 정작 그들은 자식들에게 여기저기 보여 줄 곳이 많고 스키도 배우기로 해서 50일 방문 중 삼사일만 우리 집에 머문단다.

올해도 친구랑 다른 세상 구경하러 가는 설렘에 들떠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올해도 친구랑 다른 세상 구경하러 가는 설렘에 들떠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잠을 설치게 하는 세찬 바람 소리에 창문을 여니 때아닌 겨울비가 내린다. 젖은 낙엽처럼 달라붙은 온갖 상념이 마음을 어수선하게 하고 살짝 우울감도 밀려온다. 친구에게 전화해 푸념하니 정 깊은 AI가 되어 해답을 준다.

“당신은 지금 비타민 부족 증상이 의심되는군요. 비타민 ABCD를 대신할 처방전을 보냅니다. 동행을 원하시면 연락 주세요.”

직장암과 대장암을 이겨낸 친구의 경쾌한 목소리가 의사가 되고 정비사가 되어준다.

“핑계 대고 눈치 보고 망설이는 것도 잘난 척하고 싶은 욕심이래.”

문득, 누가 봐도 스스로 결정해 놓고 잘못되면 슬그머니 남 탓으로 돌리는 내 모습을 본다.

여행은 평범한 일상의 비타민이 되어준다. /게티이미지뱅크
여행은 평범한 일상의 비타민이 되어준다. /게티이미지뱅크

나의 내면을 읽어내는 친구 덕분에 올해도 버킷리스트 실천하기를 성공한다. 겨울이지만 화사한 분홍 스카프도 샀다. 내가 여행에서 돌아오면 아들네도 뒤따라 다른 비행기에서 내릴 것이다. 어쩌다 보니 공항으로 아들 가족을 환영하러 나가는 엄마가 되었다. 예쁜 환영 플래카드도 만들어야겠다.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바람 부는 날 분홍치마라더니, 오늘따라 해학이 되어주는 우리네 속담이 참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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