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미옥의 살다보면2]
친구와 점심 약속을 했는데 장소가 생각나지 않았다
거기~ 거기~ 하다가 튀어나온 말 "나리 나리 개나리~"
나이 들면 지식 학력 외모 평준화···주눅 들 필요 없어

봄을 알리는 개나리꽃 /게티이미지뱅크
봄을 알리는 개나리꽃 /게티이미지뱅크

울타리에 심어놓은 개나리꽃 봉오리가 터질 듯 물이 올랐다. 완연한 봄날이다. 얼마 전 친구와의 점심 약속이 있었다. 장소는 최근 개업한 안동댐 근처의 경양식집이다. 막 집을 나서려는데 지나가다 들렀다는 딸이 태워주겠단다.

때마침 친구 역시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할 것 같으니 중간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쪽도 남편이 모처럼 기사를 자청했단다. 각자 차로 목적지에서 만나면 되는 간단한 계획이 이때부터 꼬이기 시작한다.

“거기 있잖아. 아··· 갑자기 생각이 안 나네··· 거기.”

“아. 그래···.”

“권정생? 아닌가? 암튼 권 선생이야, 거기.”

“그래, 누구든 먼저 도착하면 거기 입구서 기다리자.”

우리 대화를 들으며 운전하던 딸이 차를 세우더니 한심하다는 듯 묻는다.

“엄마 권정생 기념관은 일직면이야, 완전히 반대 방향이라니까요. 확실히 물어봐요.“

“에이~거기, 그냥 쭉 가면 돼.”

딸이 핀잔을 준다. 참나~무슨 대화가 그러냐, 구시렁구시렁···.

금세 전화벨이 또 울린다.

“친구야··· 생각났어. 나리 나리 개나리~”

딸은 차를 갓길에 세우고 배꼽 빠지게 웃는다.

“뭐야? 접선 신호야? 나리 나리 개나리가 뭐야? 하하하하···.”

안동댐을 지나 언덕배기를 돌아서니 멀리서 서성이는 친구가 보인다. 그곳은 안동관광문화단지 안에 위치한 나리 나리 개나리로 시작되는 '봄나들이' 동요 작곡자 '권태호 음악관' 입구다.

부부가 오래 잘 사는 비결은 소통이라고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부부가 오래 잘 사는 비결은 소통이라고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우리는 애초의 우아한 점심은 깡그리 잊어버렸다. 일찍 만난 김에 주위를 어슬렁어슬렁 산책하다가 눈에 띄는 보리밥집으로 들어가 조잘조잘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경양식은 또 다음으로 미뤄졌다.

며칠 전 동생이 놀러 와 있는데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안동을 지나는 길에 안부 전화라며···. 우리 자매가 함께 식사도 했던지라 전화기는 동생에게도 옮겨져 서로 이런저런 농담과 안부를 나누었다. 폰을 돌려받고 마무리 인사를 하려는데 그분이 자못 진지한 목소리로 나직하게 물었다.

“그런데 동생분 이름은 기억나는데 갑자기 성이 기억이 안 나네, 성이 뭐였더라?”

웃음을 참으며 나도 조용하게 되물었다.

“저 이름은 아세요?”

그분은 거침없이 내 이름 석 자를 또박또박 말했다.

“어머나, 이제 서울대 나온 선생님과 저와 학력의 평준화가 진짜 확실해졌네요.“

아~ 하는 짧은 탄성과 함께 세 사람의 웃음소리가 동시에 터졌다.

우리가 대화할 수 있는 것은 같은 언어를 써서가 아닌 서로의 말을 번역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누군가의 말이 생각난다. 

소통은 인간관계를 형성해 주고 고독과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도와준다. /게티이미지뱅크
소통은 인간관계를 형성해 주고 고독과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도와준다. /게티이미지뱅크

이전에 나는 자격지심이 참 많았다. 특히 사회에서 만나 친해진 사람들은 알고 보니 모두 고학력자에 고급 사무직 일을 하는지라 주눅이 들던 때도 있었다. 40대부터 서서히 시작된다는 지식, 학력, 외모, 재물, 건강의 평준화를 지나 90대는 평준화의 의미조차 없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본인도 헷갈린다는 말이 있다.

나이 드니 웃을 일이 많다. 고학력에 고급스런 일을 하던 젊고 유능했던 친구도 지인도 이젠 나이의 평준화로 통합이 이루어져 기죽을 일도 없다. 이해하기 어려운 이상한 언어도 해석하고 공감하는 소통 달인에, 60대의 평준화에 끼여 날마다 헤픈 웃음을 남발하니 이 또한 나이가 주는 즐거움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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