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미옥의 살다보면2]
손자 손잡고 안동탈춤축제 구경을 갔다
생일이라 자식이 보내온 안동사랑 상품권
탈탈 털려도 손자의 재능 발견으로 만족

10월이다. 가을이 오면 나는 계절병같이 살짝 우울해진다. 추석 전후로 남편 기일과 내 생일이 겹쳐 있어서다. 애쓰며 사는 자식들 주머니에서 목돈이 털린다. 모른 척하지만 엄청 미안하다. 오늘도 생일이라고 멀리 있는 아들네도 큰돈을 보내오고, 딸과 사위 손자에게서도 편지가 든 봉투를 받는다. 내년엔 더 많은 용돈을 드리기 위해 더 열심히 살겠다는 며느리와 사위, 그 말이 얼마나 고마운지 재벌 부럽지 않다.
이번엔 안동사랑 상품권도 두둑이 들어있다. 이건 지역 상권을 살리기 위해 안동에서만 소비할 수 있는 지역 화폐다. 손자 장학 통장을 채우고 싶은데 저금도 못 한다.
나의 표정을 살피던 초등학생 손자가 탈춤 축제 구경 가잔다. 마침 축제 기간이다. 세시까지 학원 시간 늦지 않게 다녀오라는 엄마의 음성을 못 들은 척 길을 나선다.
탈춤 축제야 이미 명성을 얻은 행사지만 이번 축제의 포인트는 다르다. 먹거리다. 바가지 없는 풍성한 음식들이 보는 이의 눈까지 푸짐하게 만든다. 유명한 사업가의 진심과 수완이 돋보이고 거기에 유명 채널의 ‘흑백요리사’라는 프로그램까지 타이밍을 맞춰 신풍경과 맛을 보러 온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룬다.
들어는 보았는가? 고등어 김밥, 고등어 국밥, 고등어 케밥 등등 변신한 ‘안동 간 고등어’를 보려고 선 긴 행렬이 지루하지만 기다리는 것도 즐겁다. 값도 싸고 맛있으니 상품권이 제 발로 막 나간다.

이리저리 밀려다니다 보니 축제장 한쪽 작은 코너가 눈에 띈다. 관상과 손금을 보는 곳이다. 둘 다 보는데 만원이란다. 상품권도 받는다. 어떤 이야기를 해 주실까? 기대와 호기심이 인다. 나이 든 철학자는 내 얼굴을 좌우로 돌리며 지그시 쳐다보다가 다시 내 손을 펴서 뒤집어보고 눌러보더니 드디어 한마디 하신다.
“좋네요. 다 좋아···.”
“뭐가요?”
감정선, 생명선, 두뇌선, 얼굴 관상까지 뭐든지··· 사회생활도 건강도 음식 솜씨도, 거기에 손재주도 인간관계까지 뭉뚱그려 다 좋아서 삶이 원만하단다.
···뭐야? 5분에 만원을 쓱싹?···
나의 상태와는 다 반대인 것 같고 너무 싱거운 답 같아 눈치껏 딴지를 걸어본다.
“저, 정말 일하기 싫고, 내성적이라 사람 만나는 것도 소심하고···.”
“아이고~ 일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어떻게 임하냐가 중한 거지.
이런 축제에 어울리는 것으로도 인간관계는 좋다 이겁니다.“
“저, 음식 하는 거 정말 싫어해요.”
“여자들은 음식 하는 거 다 안 좋아해. 그래도 했다 하면 잘 한다는 거요.”
“콕 집어 크게 아픈 곳은 없지만 온몸 구석구석 안 아픈 데가 없는데요.”
“아이고~ 그 나이 땐 눈만 뜨면 다 아파요. 이름 있는 큰 병 없으면 건강한 거지.”
말장난 같은 문답이지만 10분을 더 끌어서인지 그나마 돈 값어치를 뽑은 기분이다. 아리송하지만 긍정적 해답이라 기분도 좋다. 옆에서 머쓱해하는 손자 보기 민망하다.

“저거 해볼래?” 공기총 쏘는 게임장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슬쩍 물어본다.
“아빠 알면 혼날 텐데요.” 우리 둘 비밀로 하면 된다 하니 손자의 입이 귀에 걸린다.
주인이 총 겨누기랑 총알 끼우는 방법을 알려주며 상품권 한 장에 11발을 준다.
세상에 이런 일이, 첫 번째 방아쇠를 당겼는데 명중이다. 아이도 놀라 머쓱해한다. 첫발에 의기양양~ 11발 중 7발을 맞춘다. 잘하네. 흥분된 기분에 상품권이 지갑에서 자동으로 달려 나온다. 어른이고 아이고 이 맛에 게임장에 본드처럼 붙어있는 게 아닐까. 두 번, 세 번째는 11발 쏘는데 10발을 명중시킨다. 내 가슴까지 벌렁거리지만 오늘은 이만, 상황 봐서 내일 또 오자며 흥분을 가라앉힌다.
세상에서 가장 싫은 게 공부라는 요 녀석, 공부? 까짓거 대충해도 되겠다. 집중력과 순발력을 키우면 뭐가 되도 되겠다. 학원 가야 할 세시는 이미 넘었지만 둘 다 딴 짓거리에 모른 척 넘긴다. 집에 도착해 상품으로 받은 대나무술을 식탁 위에 턱 놓으며 아이는 조잘댄다. 그러면서 학원을 빠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씩씩하게 설명한다. 나도 편들어 준다. 암만, 잠자던 재능을 발견했는데 학원이 대수냐.
다음날도 손자를 불러내 오락을 조장하고 효자손 한 개를 얻어왔다.

또 다음날은 멀리서 친구가 오고 다다음날은 동생이 오고, 그 핑계로 연휴 내내 축제장으로 출근해 상품권을 휘날린다. 인생 뭐 별거랴~ 버는 사람 벌어 좋고, 쓰는 사람 쓰고 행복하면 좋은 거지. 징검다리 휴일에 축제까지 낀 황금시간, 딸이 건넨 선물로 소비는 조금 과했지만 덕분에 여유와 풍요를 한껏 누려보았다. 이 선물 참 좋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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