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주의 텐션업 갱년기]
추석 연휴 방송사 특집 프로그램에서
인생의 노래들을 마주하다

멜로디와 가사가 만들어내는 공간에 나의 이야기가 덮이면 노래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된다. /게티이미지뱅크
멜로디와 가사가 만들어내는 공간에 나의 이야기가 덮이면 노래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된다. /게티이미지뱅크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추석 연휴 느긋한 마음으로 소파에 앉아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반가운 노래를 듣게 됐다. 가수 이동원과 테너 박인수가 함께 불렀던 ‘향수’를 트윈폴리오 송창식과 윤형주가 부르고 있었다. TV에서는 공연 실황을 담은 <2025 쎄시봉 더 라스트 콘서트>(MBC)가 방송 중이었다.

1989년 발표된 이 곡은 정지용 시인의 시 ‘향수’를 노래로 만들었다는 점과 당시에는 파격적이었던 가수와 테너가 함께하는 크로스오버 가요라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그래서인지 노래 꽤나 잘한다는 선배나 친구들이 자주 불렀던 곡이었는데 20대 대학생이 가사에서 전하는 그리움을 얼마나 공감하며 노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각자 떠나온 것들을 떠올리며 정성스레 불렀고 그런 마음으로 들었던 것 같다.

화면 속 관객을 보니 중장년층이 많았는데, 그들도 나처럼 이 노래를 처음 들었던 때를 떠올리며 그 시절을 향수하고 있겠구나 싶었다. 

노래는 지난 시절을 떠올리며 그때 가졌던 감정을 되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그 노래를 자주 부르고 들었던 시간을 단번에 소환한다. 그리고 그 시간과 멀찍이 떨어진 지금 이곳에서 그때의 마음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고 보듬는 시간을 갖는다.

누구나 이렇게 노래와 함께 이야기를 풀어낼 시간을 가지고 있다. 요즘 방송 중인 오디션 프로그램 <우리들의 발라드>(SBS)에서 화제가 되었던 제주 출신 이예지 참가자의 노래도 그랬다. ‘내 인생의 첫 발라드’를 주제로 부르는 본선 1라운드에서 19세 제주 소녀가 선택한 노래는 초등학생 시절 택배 일을 하셨던 아버지의 트럭을 타고 등교하며 들었던 임재범의 ‘너를 위해’였다.

아버지를 생각하며 부르겠다는 그녀의 이야기에, 노래를 듣는 내내 제주도 해안도로를 달리는 트럭 속 아빠와 딸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담백하고 진지하게 몰입해 부르는 그녀의 노래는 150명 투표자 중 146표를 받아 최다 득표로 2라운드 진출을 확정 지었다. 

광복 80주년 KBS 대기획 '조용필, 이 순간을 영원히'를 시청하며 모처럼 행복한 명절 휴가를 보냈다. /사진=KBS
광복 80주년 KBS 대기획 '조용필, 이 순간을 영원히'를 시청하며 모처럼 행복한 명절 휴가를 보냈다. /사진=KBS

노래는 이렇게 마음을 전하고 공감하게 만든다. 부르는 사람의 마음이 와닿기도 하고, 함께 듣는 사람들과 비슷한 감정을 나누기도 한다. 그리고 그 노래를 들었었던 이전의 나를 끄집어내 마주하게 한다.

그렇게 돌아보는 힘이 지친 일상에 기운을 주고 때론 치유도 해낸다. 6일 방송된 광복 80주년 대기획 <조용필, 이 순간을 영원히>(KBS)를 시청하며 다시 한번 노래가 가진 힘을 느낄 수 있었다.

1975년 조용필의 데뷔곡이었던 ‘돌아와요 부산항에’부터 작년에 발표한 신곡 ‘찰나’까지 조용필의 57년의 무대를 대표하는 28곡들이 3시간 동안 펼쳐졌는데, 어느 한 곡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지난달 고척돔에서 열렸던 이 콘서트에 참여한 1만8000여명의 관객들 역시 나와 다르지 않아 보였다.

화면에는 초등학생 때부터 팬이었음이 분명한 중년의 친구들부터, 모처럼 한 마음으로 노래하는 초로의 부부, 엄마와 딸, 아빠와 아들, 젊은 연인들까지 각자의 시간에 새겨진 사연을 떠올리며 손뼉 치며 노래하는 이들의 모습이 함께 채워졌다. 나도 남편과 함께 방송을 시청했다.

남편은 “화려한 도시를 그리며 찾아왔네, 그곳은 춥고도 험한 곳~”(꿈)을 흥얼거리며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막막했던 20대 대학 시절을 떠올렸고, 나는 “기도하는~”(비련)에 맞춰 친구와 함께 무작정 소리를 질러댔던 10대의 시간을 만날 수 있었다. 지난 시간과 그곳의 나, 그리고 그 시절 함께했던 사람들을 떠올려 본 기분 좋은 향수(鄕愁)의 순간을 노래에 선물 받았다.

여성경제신문 김현주 공공기관인, 전 매거진 편집장 hyunjoo7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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