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감원, 정치·정무 논리로 법리 오도
폐쇄 회사나 도산 직전 예외 상황을
글로벌 기준으로 포장한 이복현 원장
"공공기관 신뢰 스스로 해쳐" 비판↑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 및 주주'로 확대하려는 상법 개정 움직임에 대해 법학계에선 "국제 기준이라는 주장은 사실 왜곡에 가깝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이 의무는 미국에서도 매우 제한적인 상황에서만 인정될 뿐이며 일반화해 제도화하는 것은 법체계의 근간을 해친다는 지적이다.
26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이복현 원장은 이날 오전 MBC라디오 인터뷰에서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상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면 해외 투자자들이 한국에 미련을 버릴 수 있다"며 "주주 충실의무는 델라웨어주 등 국제 법제에서 폭넓게 인정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 회사법의 충실의무(duty of loyalty)는 원칙적으로 이사가 '회사의 이익을 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소극적 원칙에 불과하다. 상법 전문가들은 "미국에서도 주주 개별 이익 보호가 부차적으로 논의될 뿐"이라고 강조한다. 금감원이 예외 사례를 마치 국제 통념인 것처럼 포장하는 것은 제도적 왜곡이라는 것.
금감원이 이날 언급한 델라웨어주, 캘리포니아주 외 34개 주는 모범회사법을 일정 부분 반영하긴 했지만 어디에서도 '주주 개별에 대한 충실의무'를 법으로 명시하는 것은 아니다. 금감원의 주장대로라면 미국 기업 이사회는 매 경영 판단마다 주주 개별 동의를 구해야 한다는 모순에 빠진다.
또한 금감원이 인용한 영국 회사법 172조는 '특별한 거래 상황'에 국한된 판례 해석일 뿐 일반적인 경영 판단까지 주주 이익에 종속시키는 법리는 아니다. '이해 상충 거래'나 '주주의 지위가 절대적으로 취약한 상황'에만 예외적으로 신인 의무가 확대될 뿐 이는 한국 상법에도 이미 유사한 조항이 존재한다.
주주에 대한 충실 의무를 상법에 명문화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다. 한국 상법 제398조(자기거래 제한), 제382조(이사의 책임), 제401조(회사에 대한 손해배상책임) 등은 모두 주주 권익을 방어할 수 있는 조항으로 그간 실무에서 활용되어 왔다.
또한 주주 개별 이익을 경영 판단의 중심에 둘 수 없다는 점은 미국 자본주의의 핵심 원칙인 경영 판단의 원칙(Business Judgment Rule)과도 맥을 같이 한다. 이 원칙은 이사가 절차적 정당성과 선의를 갖고 판단했다면 그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면책되는 구조다.
그럼에도 금감원이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가 ‘국제 기준’이라 단정하고 상법 개정을 윤석열 대통령 부재 기간 국가 과제로 포장하는 것에 대해 전문가는 "공공기관의 해석이 사실과 다르면 이후 모든 유권 해석의 신뢰가 무너진다"며 "정무적 목적을 위해 법리를 왜곡하는 것은 감시기관으로서 자격을 의심받을 일"이라고 경고했다.
경영 현장에서도 상법 개정 논란에 따른 혼선이 일고 있다. LS일렉트릭은 과거 나스닥 상장 경력이 있는 미국법인 LS솔루션즈의 재상장을 추진 중이다. 아울러 최근 인수한 비상장사 KOC전기와 신설법인 LSE링크의 상장도 병행하고 있지만, 일각에선 이를 구자은 회장의 지배력 강화를 위한 ‘물적분할 상장’ 프레임으로 몰고 있다.
물적분할 후 상장 논리는 제조업 기반 기업들이 외부 차입에만 의존할 경우 재무구조가 악화할 수밖에 없다는 공통된 현실 인식에서 비롯된다. 대표적으로 SK이노베이션으로부터 물적분할된 SK온은 생산설비 확충과 배터리 공급 계약 이행을 위해 중복상장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자본시장 활용 없이는 신사업 투자가 불가능한 구조라는 것이 산업계 공통의 시각이다. 즉 이런 맥락을 무시한 채 일괄적으로 ‘주주기만’으로 낙인찍는 시도는 기업의 지속 가능성에도 위협이 된다는 것. 권재열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여성경제신문과의 통화에서 "미국에서도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는 폐쇄 회사나 도산 직전 등 극히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인정될 뿐이다"며 "이를 일반 원칙처럼 제도화하는 것은 법리를 왜곡하는 일이며 공공기관이 신뢰를 잃게 만드는 자해 행위"라고 비판했다.
여성경제신문 이상헌 기자 liberty@seoul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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