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센트, 국내용 메시지 급급한 李 상대로
관찰국 해제 개입 제한 바꾸는 이중전략
한은이 어떤 수단 써도 원화 약세 불가피
KDI "외환보유고 우회 방식 투자 가능해"

이재명 대통령이 25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열린 한국경제설명회 투자서밋에서 발언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이재명 대통령, 제인 프레이저 씨티그룹 회장,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연합뉴스
이재명 대통령이 25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열린 한국경제설명회 투자서밋에서 발언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이재명 대통령, 제인 프레이저 씨티그룹 회장,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연합뉴스

이재명 대통령이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조건으로 한미 통화스와프를 언급한 가운데, 미국 재무부는 한국을 환율 관찰국 명단에서 제외하는 대신 외환당국의 시장 개입을 크게 제한하는 합의를 추진하고 있다. 스콧 베센트 미 재무장관이 직접 나선 이번 조율이 이뤄지면 한국은행이 활용할 수 있는 달러 유동성 수단이 제약을 받게 됐다.

29일 기획재정부 등에 따르면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24일 뉴욕에서 베센트 장관과 회동한 결과 “환율은 시장에서 결정된다”는 원칙을 수용했다고 밝혔다. 이는 미·일 공동성명 수준의 합의로 평가되며, 한국 정부가 통화스와프를 통한 안정 장치보다 시장 자율에 의존해야 하는 압박으로 해석된다.

외환시장 불안은 이미 현실화됐다. 원·달러 환율이 1400원 대를 돌파하며 불안정을 노출했고, 외환보유액 감소는 달러 유동성 공급 여력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보여준다. 문제는 앞으로다. 강달러 흐름이 이어질 경우 외환당국이 더 이상 효과적인 개입 수단을 확보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이창용 총재의 대응 여력은 갈수록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대규모 자본 유출이 겹칠 경우 추가 충격도 배제하기 어렵다.

환율 및 물가 급등을 막기 위해 한국은행이 활용하는 대표적 수단은 통화안정증권 발행이다. 시중 원화를 흡수해 단기 유동성을 조절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올 들어 수십조원 규모, 직전 회차만 7조원대 발행에도 불구하고 원·달러 환율은 1414원 선까지 치솟았다. 원화 흡수는 국내 자금시장의 과열을 제어하는 데는 유용하지만 달러 수급 불균형을 바로잡는 데는 한계가 뚜렷하게 드러난 것이다.

한국은행이 이와 함께 보완적으로 동원한 장치가 국민연금과의 외환스와프다. 국민연금이 해외 투자에 필요한 달러를 시장에서 조달하지 않고 한은에서 빌려 쓰는 구조다. 이후 만기가 도래하면 연금 측이 다시 달러를 갚는 방식이어서 ‘달러 선(先)공급·후(後)회수’의 효과를 낸다. 이 과정에서 당장의 외환수급 불균형을 완화할 수 있지만, 동시에 외환보유액이 일시적으로 줄어드는 부담도 생긴다.

미국의 자이언트 스텝을 견제하며 시작된 국민연금과 한국은행 간 외환스와프는 급증세를 보였다. 2022년 첫 계약 당시 100억 달러 규모에 불과했던 거래는 2023년 21건, 2024년 25건 수준이었으나, 올해 상반기에만 84건을 기록하며 3배 이상 폭증했다. 지난해 12월 계엄 사태 이후 환율이 1450원을 돌파하자 국민연금이 전략적 환헤지 수단으로 스와프를 적극 활용한 결과다.

종합하면 통화안정증권은 국내 자금시장의 과열을 제어하는 내적 수단이고, 외환스와프는 국제 금융시장에서 달러 수요를 분산시키는 외적 수단이다. 그러나 두 장치 모두 단기 안정에는 유용하지만, 구조적 환율 압력이나 대규모 자본 유출 상황에서는 ‘보조 안전판’ 이상의 해법이 되지 못한다는 지적이 따른다.

국민연금 스와프는 그동안 한국 외환당국이 급한 불을 끌 수 있는 임시 방파제였다. 그러나 미국 재무부가 환율 보고서에서 직접 문제 삼고, 구윤철 부총리와 스콧 베센트 장관 간 합의로 개입 여지를 제한한 순간 이 장치의 확장성은 사실상 소멸됐다. 우회적 수단이었던 연금 스와프조차 틀어막힌 상황에서 미국이 정작 원천적인 통화스와프를 허용할 리는 만무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이번 사안을 두고 “투자 수익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손실이 불가피하다”면서도 동시에 “1조304억 달러 규모의 기존 대외자산의 투자처 전환이라면 충격은 크지 않다”고 단서를 달았다. 이는 외환보유액에서 달러를 직접 빼내는 방식의 위험성을 경고하면서도 트럼프 행정부가 요구하는 선불(up-front) 출자를 위해선 한미 통화스와프 말고는 대안이 없다는 정부의 벼랑끝 논리를 간접적으로 반박한 셈이다.

통화스와프는 양국 간 신뢰와 정책적 협력을 전제로 성립한다. 그러나 미국은 이번 환율 협상을 계기로 한국 통화당국의 외환 개입을 노골적으로 경계 대상으로 분류했다. 개입을 최소화하라는 압박이 문서화된 상황에서 ‘무제한 달러 백스톱’을 기대한다는 발상 자체가 모순이라는 지적이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환율 방어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책임을 외부 조건, 특히 3500억 달러 대미 투자 조건으로 전가하는 한국 정부의 태도를 문제 삼는다. 김정식 연세대 명예교수는 이날 여성경제신문과의 통화에서 “미국 입장에서도 관세 효과를 상쇄하는 환율 상승을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한국이 관찰대상국에서 빠졌다면 미국이 요구하는 대규모 투자와 환시 개입 자제라는 교환 조건이 깔린 정치적 메시지로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18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국제통화기금(IMF) 본부에서 한국은행 통화정책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한국은행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18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국제통화기금(IMF) 본부에서 한국은행 통화정책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한국은행

미국 뉴욕에서 자신을 찾아온 이재명 대통령이 ‘통화스와프’라는 국내용 메시지에 기대고 있다는 점을 간파한 베센트 장관이 이중 전략을 취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한국 정부가 환율 관찰대상국 해제를 국내용 성과로 선전하길 바라는 상황에서 이를 미끼 삼아 외환 개입 제한을 명문화하는 합의를 밀어붙여 통화스와프 카드를 꺼낼 공간 자체를 원천 봉쇄한 것.

한편 미국 재무부가 정한 환율 관찰대상국 지정 요건은 △대미 무역흑자 150억 달러 초과 △GDP 대비 3% 이상의 경상수지 흑자 △GDP 대비 2% 이상 규모의 외환시장 개입 등 세 가지다. 한국은 최근 경상흑자 비중이 5~6% 수준에 달하고, 국민연금 외환스와프 거래도 GDP의 수%대에 이를 만큼 급증한 상황이라 지정 해제가 어렵다는 관측이 우세했다.

여성경제신문 이상헌 기자 liberty@seoul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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