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수조원 써도 달러 쏠림 못 막아내
10월 2조 환매, 금통위 절묘하게 겹쳐
“숫자상 규모 부풀리기 눈속임” 비판도
통화당국 10월 금리 인하 포기 분위기

25일 서울 명동 시내 한 환전소에 환율이 표시돼 있다. 원/달러 환율은 전날 야간 거래에서 장중 1400원을 넘어선 뒤, 지난 5월 14일(야간 거래 종가·1404.5원) 이후 최고치인 1403.8원에 거래를 마쳤다. /연합뉴스
25일 서울 명동 시내 한 환전소에 환율이 표시돼 있다. 원/달러 환율은 전날 야간 거래에서 장중 1400원을 넘어선 뒤, 지난 5월 14일(야간 거래 종가·1404.5원) 이후 최고치인 1403.8원에 거래를 마쳤다. /연합뉴스

한국은행이 8월부터 10월까지 석 달 동안 20조원에 달하는 통화안정증권을 발행했지만, 원·달러 환율은 결국 1400원 선을 넘어섰다. 정부와 한은의 단기 대응 카드가 환율 오름세를 근본적으로 꺾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통안증권은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채권 성격의 단기 금융상품으로, 시중의 원화를 흡수해 유동성 공급 속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원화 약세가 과도할 때 간접적인 환율 방어 수단으로 활용된다. 이번 연속 발행도 같은 맥락에서 추진됐다.

8월에는 총 8조원 규모가 발행됐다. 경쟁입찰만 7조2000억원에 달했고, 나머지는 모집 방식으로 채워졌다. 단기물 위주의 집중 발행으로 달러 수요를 묶어두려는 의도가 뚜렷했다. 9월에는 규모를 9조4000억원으로 늘렸다. 전월보다 1조4000억원 많아졌지만 환율은 여전히 1400원 선을 위협하며 상승세를 이어갔다.

2025년 상반기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정국 속에서 급등했던 원·달러 환율은 5월 잠시 안정세를 보였으나, 불과 몇 달 만에 다시 1400원 선을 위협했다. 한국은행이 8~9월 두 달간 17조원 규모의 통안증권을 발행했음에도 달러 쏠림을 완화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심리적 안정 효과도 제한적이었다. 결국 통안증권은 환율 방어의 ‘보조 수단’일 뿐 근본 처방이 될 수 없다는 한계가 드러났다.

통안증권 발행에도 불구하고 달러 쏠림은 오히려 심화된 것은 통계에서도 나타난다. 8월 기준 거주자 외화예금은 한 달 새 22.4억 달러 늘었다. 원화 유동성을 흡수해도 기업과 개인이 다시 이를 달러로 전환해 예치하는 구조가 형성되면서, 통안증권은 ‘심리 안정제’ 구실조차 하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시장이 정부·한은의 정책 의도를 신뢰하지 못해 통안증권이 흡수한 유동성이 곧바로 달러 수요로 되돌아가는 악순환이다.

환율 안정을 위한 ‘통화스와프 기대감’마저 꺾였다. 이재명 대통령, 이창용 한은 총재, 구윤철 경제부총리가 잇따라 스콧 베센트 미 재무장관을 만났음에도 협상의 여지는 없다는 기류가 확인된 것이다. 정부가 수조원을 풀어 통안증권을 쏟아내면서도 시장 심리를 붙잡지 못한 상황에서 외환 안전판으로 여겨진 통화스와프 카드마저 무산되자 정책 신뢰성은 한층 흔들리게 됐다. 금융시장의 불안이 깊어지면서 대외 신뢰 역시 흔들리며 정치적 파장으로 번지고 있다.

트럼프 방한을 앞두고 깅그리치 전 미 하원의장은 전일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한국 정치 상황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그는 “한국은 현 대통령 아래에서 친중, 공산주의 독재(a pro-Chinese, communist dictatorship)를 향해 가는 매우 심각한 상황(very serious situation)에 처해 있다”고 주장하며, 한국이 미국과의 협력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4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주유엔 대한민국대표부에서 스콧 베센트 미국 재무장관과 면담하고 있다. /연합뉴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4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주유엔 대한민국대표부에서 스콧 베센트 미국 재무장관과 면담하고 있다. /연합뉴스

같은 날 김용범 정책실장은 ‘경주 APEC이 대미 투자와 관세 협상의 중요한 계기’라며 기대감을 높였지만 이는 실질적 협상카드가 부족한 상황에서 한국 정책당국이 위기 때마다 보여온 이벤트 의존형 성향을 되풀이한 것에 불과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특히 10월 발행 일정은 오는 29일 경주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와 절묘하게 맞물려 있다. 한국은행은 총 8조6000억원 규모를 내놓는데, 경쟁입찰 7조6000억원, 모집 7000억~1조원으로 구성됐다. 발행은 13일부터 29일까지 네 차례 이어지고21일에는 2조원 규모 환매도 예정돼 있다.

환매란 이미 발행한 통안증권을 되사들여 시중에 다시 원화 유동성을 공급하는 조치다. 자금시장 경색을 완화하는 ‘통화 긴축 속도 조절’ 수단이지만, 타이밍상 환율 안정 신호로 작용하기는 어렵다. 결국 새 발행과 환매가 맞물리며 ‘2조원 돌려막기’ 구조가 형성돼 환율 방어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일정이 경주 APEC 정상회의와 맞물린 것은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는 시각도 있다. 외환시장 안정을 위한 독립적 정책이라기보다 정치 이벤트에 맞춘 ‘시간 벌기’로 해석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발행과 환매 시점이 정치 일정에 끼워 맞춰지며 정책 신뢰성 논란도 커지고 있다.

한국은행의 스케쥴도 논란의 불씨다. 10월 21일 환매를 배치한 이유는 자금시장 경색을 미리 풀어두려는 의도지만, 불과 이틀 뒤인 23일 금통위를 앞두고 ‘통화안정 조치는 이미 진행 중’이라는 명분을 쌓으려는 계산이 깔렸다는 해석이 뒤따른다. 금리 인하 요구를 미리 차단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는 지점이다.

이창용 총재가 평소 “환율 상승기에 금리 인하는 불난 데 기름 붓는 격”이라고 강조해온 점을 고려하면, 발행과 환매가 금융시장 안정보다는 금통위 결정을 뒷받침하는 도구로 활용된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결국 중앙은행의 독립성 논란이 불가피해 보인다.

마지막 고리는 31일 경주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다. 발행과 환매, 금통위 회의를 거쳐 환율 불안을 잠시 눌러둔 상태에서 정치적 이벤트를 통과하려는 계산이 겹쳐 있다. 그러나 한편에선 이를 두고 “숫자상 발행 규모만 키워 보이게 만드는 눈속임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일고 있다.

여성경제신문 이상헌 기자 liberty@seoul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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