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핵심 참모 직접 접촉했지만
李 "상업적 합리성" 주장에 선 그어
외환보유 구조 외면 정부 논리 한계
아르헨티나 유사 위기 자인하는 꼴

원·달러 환율이 심리적 마지노선인 1400원을 넘겨 개장한 가운데 한미 통화스와프가 쟁점으로 부상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25일(현지시각) 뉴욕에서 스콧 베센트 미 재무장관을 만나 3500억 달러 투자 패키지 논의에 나서 “상업적 합리성”을 강조했다.
지금까지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 등 주변 채널만 상대하던 한국이 이번에 처음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복심인 베센트를 직접 접촉한 것은 의미 있는 진전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베센트는 최근 중국과의 틱톡 협상을 주도할 정도로 백악관의 핵심 참모로 꼽히는 인물이다.
베센트의 대답은 미묘했다. 그는 “일시적이고 단기적 어려움은 충분히 극복 가능하다”며 사실상 한국 정부가 내세운 ‘무제한 통화스와프 필요론’에 선을 그었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전날 “무제한 스와프가 필요조건”이라고 못 박은 것과 달리 미국은 유동성 문제는 한국이 자력으로 풀라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통화스와프는 본질적으로 외환시장 불안정 시 일시적 유동성을 공급하는 안전장치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대규모 투자 재원 조달 수단처럼 포장하며 국내 정치용으로 활용해왔다. IMF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방식으로 “외환보유액 84%에 해당한다”는 식의 프레임을 씌웠지만, 실제로는 이미 달러 중심의 안전자산 위주로 보유액이 운용되고 있어 과장된 해석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5500억 달러 투자 약속에도 불구하고 상설 통화스와프를 활용하기보다 자체 현금흐름과 차입으로 대응하겠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만 스와프를 만병통치약처럼 내세우는 모양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비기축통화국인 한국과 일시적 통화스와프를 체결할 유인조차 없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이런 구조를 외면한 채 ‘필요조건’으로 규정하면서 오히려 협상력이 약화됐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베센트가 강조한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동맹간 신뢰를 유지하려면 유동성은 스스로 감당하라는 얘기다.
더 큰 문제는 한국은행까지 이 정치 프레임에 끌려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정부가 스와프 카드를 띄우자 한은은 “정부 관계기관과 협의 중”이라고 해명했는데 자칫 뉴욕 연방준비제도와의 직접 협상이 아니라 국내용 구색 맞추기로 해석될 여지가 크다.
한은은 통화정책의 독립성과 신뢰를 기반으로 움직여야 하는 기관이다. 더욱이 황건일 금통위원이 다자간 통화스와프를 꺼내들며 “고도의 정치적 영역”이라고 규정한 대목은 모순적이다. 독립적 금융정책 기구의 위원이 정치성을 전제로 스와프 필요성을 언급한 순간, 한은이 정부의 대외 협상 논리에 끌려 들어간 모양새를 자인한 셈이 됐기 때문이다.
2025년 7월 기준 한국의 외환보유액 중 71.9%가 달러 자산으로 구성돼 있다. 이미 달러 중심 구조를 갖춘 상황에서 위안화 등 비(非)기축통화를 끌어들인 다자간 스와프는 실질적 안정 효과가 미미하다. 달러화 유동성이 본질적 안전판인데, 가치 변동성이 큰 통화를 더 얹는다고 환율 방어력이 강화되지 않는다. 오히려 스와프가 정치적 제스처로만 소비되며 금융시장에 잘못된 시그널을 줄 수 있다.
한국측의 방어 논리도 약하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미국이 요구하는 ‘캐시플로’를 곧장 에쿼티(현금 직접투자)에 가깝다고 규정했다. 미국 입장에선 투자 성격의 현금흐름을 원하고, 한국은 대출이나 보증 같은 금융적 수단을 내세우려는 구도이지만 이를 곧바로 ‘에쿼티 강요’로 몰아붙이는 건 협상 언어를 단순 번역해 왜곡한 셈이다.
김 실장이 “대출 속성을 가지도록 문안 협상 중”이라고 강조한 부분은 자가당착이다. 대출은 본질적으로 상환 의무를 동반하고, 보증은 위험 분담을 요구하며, 투자는 소유권 이전을 의미한다. 즉 세 가지 모두가 현금흐름(Cash flow)이라는 공통된 틀 속에 있는 금융 행위인데 이를 억지로 구분해 협상 카드로 쓰는 순간 스스로 협상력을 갉아먹는 결과가 된다.
여성경제신문 이상헌 기자 liberty@seoul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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