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깐한 팩트 탐구]
의대 증원 규모 논의 단 한 차례도 없어
韓 보정심 1명 vs 日 분과회 16명이 의사
대통령실 선진 모델 반영시킬 역량 부족

정부와 의료계의 대립이 여당의 총선 패배 후에도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정부는 의료 개혁의 당위성과 절차적 정당성을 주장하며 물러서지 않고 있다. 총선 후 여야 정치권에선 의대 정원 증원을 논의하기 위한 사회적 협의체 구성을 내놓고 있다.
여성경제신문은 이 같은 정부 입장과 정치권의 제안을 '깐깐한 팩트탐구' 코너를 통해 점검해 봤다.
먼저 정부가 주장하는 절차적 정당성에선 정부의 설명과 그동안 진행된 실제 과정은 거리가 상당한 것으로 확인됐다.
정부는 의협과 공식 소통 채널을 구성해 28차례 논의를 진행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더욱이 정부는 의협 외에도 학회, 병원계, 소비자단체 등을 포함하면 130회 이상의 논의를 진행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부와 대한의사협회가 지난 2023년 1월~2024년 1월 사이 연 28차례 '의료현안협의체' 회의에서는 의대 정원을 몇 명으로 늘려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한 번도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의협은 2020년 9·4 의정 합의를 근거로 정부가 의정협의체 내부에서 논의되지 않은 의사 수급 정책을 강행해선 안 된다는 입장을 바꾼 적이 없다. 지난해 11월 정부의 일방적인 수요조사 발표에 반발한 의협은 양동호 단장을 중심으로 제2기 의료현안협의체 협상단을 구성했다.
의협 측의 제2기 협상단에 참가한 박형욱 단국대 의예과 교수는 십여 차례의 회의가 열렸으나 참석자, 안건, 회의자료, 발언 내용을 알 수 없는 밀실 회담이 이어졌다고 폭로했다. 박 교수는 "복지부는 회의자료를 사전에 주지 않았으며 회의가 끝나면 비밀이라면서 도로 회수해 갔다"고 전했다.
의협 측 참석자들에 따르면 회의자료에 '의대 증원 원칙'이라는 내용이 처음으로 담긴 것은 12월 13일 제20차 의료현안협의체 회의에서였다. 미리 회의 자료를 보내주지도 않은 상황에서 복지부는 다짜고짜 "의대 증원 원칙에 대해 합의를 도출하자"고 요구했고 당연히 양측의 합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정부 증원 발표 직전인 1월 31일 진행된 제27차 의료현안협의체 회의에서 의협 측이 정부의 의대 증원 발표 낌새를 느끼고 TV 토론을 제안했지만 복지부는 이를 거부했다. 복지부는 엿새 뒤인 2월 6일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를 열었다.
그런데 2월 6일 열린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는 2025학년도부터 매해 정원을 2000명 추가로 늘려 2031년부터 2035년까지 최대 1만명의 의사 인력을 확충한다는 정부안을 불과 1시간 만에 통과시키고 회의를 종결한 것으로 확인됐다.
복지부 산하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 위원은 총 25명으로 정부위원 7명, 수요자대표(환자단체, 소비자단체, 언론) 6명, 공급자대표 6명, 전문가 5명으로 구성돼 있다. 의대 정원 늘리기에 반대하는 의사단체 대표는 대한의사협회 한 명뿐이다.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은 정부의 주장과 달리 의사단체와의 실질적인 소통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된 셈이다.

복지부의 수상한 회의자료 감추기
日은 홈페이지에 내용 완전 공개
밀실서 찍어 누르기 식 한국과 딴판
그렇다면 정부가 의대 정원 증원의 모범사례로 내세운 일본은 어땠을까.
의협 의료정책연구원이 후생노동성의 2023년 '제8차 (전기)의사확보계획' 결정 과정을 분석한 결과 일본의 의사 수급 정책은 의사 인력수급검토회와 의사 수급분과회 두 축으로 철저한 상향식 의사결정 체계를 가진 것으로 조사됐다.
먼저 후생노동성이 의사 편중 결과를 각 도도부현(한국의 지방자치단체 개념)에 제공하면 각각의 도도부현이 2차 진료권 및 소아과·산부인과 진료권 검토를 받은 뒤 후생노동성에 의견을 제출한다. 일본은 2015년부터 의료인력 수급 전망과 편재 문제를 중점적으로 논의하기 위해 이와 같은 회의체를 발족했다.
특히 미래 의사 인력 수급 추계는 후생노동성의 '의료종사자의 수급에 관한 검토회' 산하 '의사 수급분과회'에서 중점 관리되고 있다. 2022년 1월 기준 총 22명 중 의사 출신 구성원은 총 16명이며, 그 외 간호사 2명, 법학자 1명, 경제학자 1명, 기자 1명 외 기타 1명(교육학 전공)으로 구성돼 있다. 의사 수급을 결정하는 기구의 구성원 가운데 의사 출신 비율이 73%나 된다.
의대 정원 1만명 증원을 결정한 한국의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 위원 25명 가운데 의사 입장을 대변하는 위원이 달랑 한 명뿐인 한국과 극단적인 대조를 이룬다.

모든 회의자료 및 논의 결과는 홈페이지에 공개된다. 한국처럼 대통령실이 2000명을 정해 찍어 누르는 하향식이 아닌 전문가들이 결정해 후생노동성에 권고하는 상향식이다. 2023년 정책 가이드라인을 보면 △의사 편재 지표 계산 △의사 확보 계획 수립에까지 대부분의 단계에서 도도부현의 의견이 반영된다.
본지 취재 결과 일본 후생노동성 홈페이지엔 지난 2022년 7월까지 개최된 총 40회의 회의자료가 공개돼 있다. 외과 및 내과 그리고 필수 의료과는 물론 물리치료사와 작업치료사의 장기 수급계획도 해당 분과 회의에서 결정된다. 모든 참석자의 발언은 실명 공개되며 사무국은 위원들에게 사전 회의 자료를 제공한다.
그렇다면 정부와 정치권이 내세우고 있는 사회적 협의체는 어떨까.
지난 1일 성태윤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는 사회적 협의체엔 국민과 의료계, 전문가, 환자, 소비자단체, 정부 등 다양한 구성원이 참여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주당에서 추진 중인 공론화 특위 구성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전망이다. 이에 더해 민주당은 의료 공백·의정 갈등 해결을 위한 민·의·당·정 4자 협의체 구성을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조합주의' 또는 '소비에트 식 인민민주주의'에 근거한 위원회는 실체가 불분명한 사회적 합의에 수동적으로 끌려다닐 위험성이 크다는 지적을 받는다. 1997년 12월 3일 한국경제가 IMF 관리 체제에 들어가면서 구제금융을 받는 조건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발족한 '노사정위원회'의 전철을 밟을 공산이 크다는 얘기다.
일본에서도 의대 정원은 의사가 주축이 된 기구에서 현장 조사를 통해 상향식으로 정부에 건의하는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의료계 관계자는 "정부가 일방적으로 결정한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을 고집할 게 아니라 일본처럼 면밀한 현장 조사와 투명한 논의를 통해 정원을 도출하는 게 합리적"이라며 "사회적 협의체는 자칫 이해관계자 간에 이견만 노출할 뿐 합의를 끌어내기 어려운 구조여서 노사정위원회처럼 유명무실해질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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