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미옥의 살다보면2]
유통업이라고 해서 지원했다는 그녀
빈자리 없다며 주방 설거지부터 시켜
긍정적 마인드에 주변 호감도 '쑥쑥'
몇 주 뒤 '최고 자리'라는 카운터 꿰차

(지난 회에서 이어짐) 가장 낮은 일자리라고 무심했더니 내 자리를 누가 차지하고 서 있었다.
중년이라 해도 곱게 나이 든 그녀의 모습에 호감이 갔다. 그의 이력 또한 설거지랑은 전혀 안 어울렸다. 서울서 살다 남편 따라 안동으로 내려오니 아는 사람도 없고 할 것도 없는 백수가 되었단다. 간만에 여유를 갖고 시간을 보내도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무 일이나 해보자 하고 알바천국이란 곳에 이력서를 보냈는데 3개월 만에 연락이 왔다.
‘ㅇㅇ유통 판매직’
고 이순자 작가의 ‘예순 실버 취업 분투기’의 수기처럼 온갖 화려한 경력도 나이가 들면 별로 소용이 없다. 그나마 청소나 아이 돌봄이 아닌 판매직이라니 다행이라 생각했다. 주소를 찍어 와보니 휴게소라, 판매직에 어울리게 차려입고 왔는데 빈자리가 없으니 자리가 나면 부르겠다며 주방으로 안내해 줬다.
고무장화로 바꿔 신고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비닐 앞치마를 두르고, 순식간에 신데렐라에서 무수리 꼴로 변신하였다. 몸 쓰는 노동을 가장 낮은 일로 보는 사회 분위기지만 이 나이 먹도록 한 번도 안 해본 일을 경험해 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에 마음을 바꿔 먹으니 흥미로웠다.
“ 주방일이 거기서 거기 아닐까요. 호호.”
벽으로 막힌 공간에 사람이 모이면 어떤 곳이든 규율과 권력이 존재한다. 나그네들만 모인 이곳 주방도 그렇다. 밥 짓는 사람, 반찬 만드는 사람, 배열하는 사람, 재료 수급자, 점검자, 설거지일 등 분야별로 톱니바퀴처럼 일이 물려 돌아간다. 설거지가 가장 낮은 일 같아도 어우러져 순환되어야 식판 한 개가 완성되어 손님에게 인계된다. 한 가지도 소홀할 수 없는 주방 세상이다.
그녀의 초보 견습은 20년 근속 왕언니가 저절로 맡아졌다. 요리조리 따라다니면서 잔소리다. 재밌는 것은 순간순간 고함이 날 때마다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넵 알겠습니다~.” 이등병 구호 외치듯 크게 대답하고 또 실수 연발이다. 배울 자세로 쫄랑거리며 따라다니는, 예쁘기까지 한 며느리 모습엔 못된 시어머니 역할도 제대로 못 하게 만든다. 텃새가 심하다더니 텃새는커녕 종일 웃음소리에 주방이 환해졌다.
이곳은 ‘내가 낸데 니(네)가 뭔데’로 나가면 눈 깜짝할 새에 퇴출당하여 바람과 함께 사라진다. 회사에서 좋은 사람을 골라 뽑아줘도 마지막 평가는 이곳 주방에서 한다. 조직에서는 소통이 첫째다.

그렇게 처음 강렬한 느낌으로 만난 게 그녀와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려니 했다. 몇 주가 지나고 급하게 또 알바 호출이 왔다. 아침 일찍 주방에 들어가니 그곳의 최고 자리인 카운터에 그녀가 서 있다. 너무 반갑고 힘든 일을 이겨낸 그녀가 놀라웠다.
“곳간 일도(쌀 씻는 일) 3년이 지나야 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셨잖아요. 왕초보가 어떻게 저 높은 곳에, 하하~~”
“말도마라, 성격 좋제, 일머리까지 좋으니 가르칠 게 없어. 흐흐~“
못된 시어머니역의 선배 언니 대답이 맛깔스럽다. 많이 배웠어도 겸손하고 생각이 긍정적인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우리 나이는 무얼 하느냐 보단 어딘가를 나간다는 게 중요한 거지요. 몸 쓰는 일을 하니 피곤해서 온갖 걱정은 내일로 미루고 누우면 잠이 저절로 와요. 잠이 보약이야. 따지고 보면 지식을 파는 거나 고등어를 구워 파는 거나 그게 그거죠 뭐. 호호호~“
하루 일은 고되고 힘들어도 출근은 기대된다고 하니 다행이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시간이 엇갈려 한 번도 마주치지 못한 앞집 언니를 건물 뒤쪽에 위치한 직원용 식당에서 만났다. 들어오며 모두 한마디씩 한다.
“엄마요~ 오늘은 반찬이 뭐에요?” “역시 집밥이 최고, 정말 맛있어요.”
곧이어 젊은 여직원이 들어오더니 내 눈엔 진수성찬인 식단을 쓱 훑어보며 구시렁거렸다.
“엄마요~ 오늘은 고기반찬이 없네, 난 고기 없으면 안 먹을 거얏.”
헐, 이건 나의 멘트인데 직장에서도 밥투정이라니, 나는 새침한 아가씨와 친정엄마 같은 앞집 언니를 보며 괜스레 허둥대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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