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 채권을 단기 어음으로 막아내
재무적 미스매칭 문제 노출한 상황
1997년 패턴 유사···정부 속수무책

"모든 채무를 완전하게 뿐만 아니라 적기에 충족시킬 수 있는—즉, 채권자에게 지불유예적 성격을 지닌 그 어떤 것도 요청할 필요가 없는—자산 상태를 유동성이라 일컫는다." -루트비히 폰 미제스 『화폐와 신용의 이론』

평소엔 철옹성 같은 댐이라도 미세한 균열 한두 개가 무너뜨릴 수 있다. 돈은 늘 가장 약한 고리를 물어뜯기 때문이다. 최근의 금융시장이 그렇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의 고금리 정책의 여파로 한껏 예민해진 상황에서 작은 '헛발질'이 시장 전체를 패닉으로 몰아갈 수 있다.

국가나 다름없는 신용도를 가진 지방자치단체의 지급보증 이행 거부로 촉발된 '레고랜드' 사태에 이어 흥국생명의 신종자본증권 조기 상환 거부 해프닝이 금융시장을 흔들고 있다. 불안해진 돈은 가장 약한 고리를 찾아 공격한다. 부동산 경기 침체로 곤경에 빠진 건설회사가 먹잇감으로 떠올랐다. 

윤석열 정부가 50조원 이상의 유동성 지원조치를 발표하고 채권시장안정펀드 가동에 나섰지만 치솟는 단기 조달 금리를 막아내지 못하고 있다. 적자를 메꾸기 위해 20조원대의 공사채를 발행한 한국전력공사 등 초우량 공기업은 시중자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고 있다.

금융감독원도 비상이다. 이복현 원장은 "단기 성과에만 집착해 선제적 리스크 관리를 소홀히 한 금융기관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리겠다"고 밝혔다. 은행은 항상 부채를 청산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공황에 빠진 일반 대중들이 출금을 위해 카운터로 한꺼번에 몰릴 경우까지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뱅크런이 닥치면 만기가 30일밖에 남지 않은 어음이나 집을 저당 잡은 주택저당채권도 은행 입장에선 아무런 차이 없는 위험 자산일 뿐이다. 이에 여성경제신문이 '흔들리는 신용' 시리즈 기획을 통해 금융시장 안팎의 위기를 진단해 본다. [편집자주]

① 레고랜드 이어 흥국생명도···돌려막기 시작했다
② 한전채 늘려 위기 촉발한 정부 또 CP 사재기?
③ 내년 상반기 최대 고비···부동산 PF 만기가 뇌관  
④ IMF 때도 종금사 부도까지 BIS 양호, 지금은?

레고랜드발 채권 파동이 회사채 시장을 마비시키면서 뱅크런 양상을 일부 보이고 있다. 지난달 스웨덴 왕립 노벨위원회가 벤 버냉키 전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을 2022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발표하면서 참고 자료로 첨부한 1930년대 대공황 상태 당시 뱅크런을 묘사한 그림. /노벨위원회
레고랜드발 채권 파동이 회사채 시장을 마비시키면서 뱅크런 양상을 일부 보이고 있다. 지난달 스웨덴 왕립 노벨위원회가 벤 버냉키 전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을 2022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발표하면서 참고 자료로 첨부한 1930년대 대공황 상태 당시 뱅크런을 묘사한 그림. /노벨위원회

레고랜드 사태와 함께 시작된 채권 파동이 금융 시장을 덮친 가운데, 흥국생명이 모라토리엄(Moratorium, 대외채무에 대한 지불유예)을 가까스로 모면했다.

9일 금융감독원 등에 따르면 흥국생명은 5억 달러 규모의 신종자본증권(콜옵션) 상환을 연기하는 기존의 입장을 번복하고 이날 4000억~5000억원의 환매조건부채권(RP)을 발행해 상환하기로 했다. 흥국생명이 발행한 RP는 국민·신한·우리·하나 등 4대 시중은행과 보험사 등이 매입할 것으로 보인다.

신종자본증권은 만기가 30년 이상인 채권을 말한다. 사실상 영구채나 다름없어 회계상 채권이 아니라 자본으로 인정받는다. 지급여력비율을 일정 수준 이상 유지해야 하는 보험사 입장에선 빚이 아니라 자본으로 인정받는 신종자본증권을 선호하게 된다.

신종자본증권의 만기는 30년이지만 대개 5년마다 보험사가 돈을 갚을 수 있는 콜옵션을 행사해 조기상환을 해주는 게 업계 관행이다. 그런데 흥국생명이 이번에 이를 깨고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게 해외투자자의 '역린'을 건드렸다. 안 그래도 금융시장이 불안해 대출만기를 단기로 가려가려는 투자자 입장에서 상환을 거부하는 건 신뢰를 무너뜨리는 행위로 비칠 수밖에 없다.

앞서 기획재정부와 금융위원회는 흥국생명의 콜옵션 미행사에 대한 불개입 원칙을 고수해 왔다. 하지만 지난 1일 흥국생명의 지불유예 방침 발표 후 외화표시채권(한국물·Korean Paper) 가격이 급락하는 등 후폭풍이 이어지자 금융당국이 직접 개입하는 것으로 방침을 바꿨다.

흥국생명이 조기상환을 해줄 돈이 없자 은행이 RP로 흥국생명에 단기 자금을 빌려줘 급한 불을 끄게 해주도록 금융당국이 조율을 했다. 최상목 경제수석은 레고랜드·흥국생명의 모라토리엄 소동과 관련 "금융시장의 본질적 부분이 아니다"라면서 "시장과 잘 소통하면서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주현 금융위원장도 은행장과의 간담회에서 "미리 조치를 준비한 방식으로 대응하자고 (흥국생명 측에 제안)했고,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을 다시 추진해 사태가 해결됐다"고 설명했다.

대통령실을 비롯한 각 부처 경제 수장들의 잇따른 진화 작업에도 불구하고, 대주주인 태광그룹의 증자로 가까스로 모라토리엄을 피해간 흥국생명 사태는 은행이 리볼빙을 중단할 경우 언제라도 부도가 발생할 수 있는 재무적 미스매칭을 노출한 사례가 됐다.

RP란 채권 발행 후 조건을 충족하면 다시 되사주는 '환매' 조건이 붙은 증권으로 만기가 3개월, 1년으로 짧은 편이다. 즉 흥국생명은 5년짜리 신종자본증권 조기상환을 위해 단기 자금인 RP를 끌어다 쓰는 궁여지책을 선택한 것이다. 흥국생명이 빠른 시간 안에 장기 자금을 마련해 RP를 상환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유동성 위기에 빠질 수 있는 상황이란 얘기다.

채권시장에서 모라토리엄 소동을 일으킨 흥국생명과 레고랜드 본사 전경. /각 사
채권시장에서 모라토리엄 소동을 일으킨 흥국생명과 레고랜드 본사 전경. /각 사

정부 50조·금융사 95조 공급에도
멈출 줄 모르는 CP금리 고공행진  
기업신용 위험 수치상 개선 없어

윤석열 정부는 50조원대 금융지원 이외에도 농협은행을 포함한 5대 금융지주사들이 연말까지 95조원 규모의 유동성을 공급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동시에 금융사의 은행채 발행도 자제시킨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럼에도 수치상으로 나타나는 기업 신용 위험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기업어음(CP) 금리는 레고랜드·흥국생명 사태를 거치면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처음 연 5.0%를 기록했다. 이날 오후 4시 신용등급 A1 기준 CP 91일물 금리는 전 거래일보다 0.04%포인트 오른 연 5.02%로 집계됐다. 2009년 1월 15일의 기록을 갈아치운 것이다.

단기자금시장 투자 심리를 나타내는 지표인 CP 금리는 지난 9월 21일(3.13%) 이후 33 거래일 연속 상승세를 이어가는 중이다. CP 금리는 은행의 양도성예금(CD) 금리에 가산금리를 더해 발행금리가 결정되는 식이다. 이들 금리 격차가 커졌다는 것은 기업의 신용 위험도가 은행보다 높아져 자금 조달에  적색 경보가 내려진 상황을 의미한다.

지난달 28일 기준 레고랜드 사태 효과로 CP 91일물 금리와 CD 91일물 간의 금리 스프레드는 610bp(1bp=0.01%)를 기록해 한 달 만에 490bp 넘게 벌어졌다. 또 91일물 CP와 CP 간 금리차는 전일 기준 1010bp까지 격차를 넓혔다.

금리 상승기 회사채 시장까지 얼어붙으면서 기업이 어음 돌려막기로 버티는 형국이 된 것이다. 담보 없이 신용으로 발행되는 CP는 발행 절차가 복잡하지 않고, 금리와 만기를 쉽게 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최상위 신용등급인 기업도 연 5~6%대 CP 금리를 제시해야 투자자를 구할 수 있는 형편이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이 9일 오전 서울 중구 은행연합회에서 열린 은행장 간담회에서 참석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김주현 금융위원장이 9일 오전 서울 중구 은행연합회에서 열린 은행장 간담회에서 참석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SK그룹의 장기 CP 발행은 IMF 전조?
카드빚 돌려 막기 위해 대출 늘린 격

개인에 비유하면 은행빚을 돌려막기 위해 단기카드 대출을 늘리는 상황이 기업 현장에서 전개된다는 얘기다. 특히 이달 들어 회사채 시장의 큰 손으로 꼽히는 SK가 2000억원 규모의 장기(3년·5년 만기) CP를 처음으로 발행한 것도 주목되는 포인트다. 금리는 3년물 5.629%, 5년물 5.745%로 잡혔다.

1990년대 중반 30여 개로 난립한 종합금융사가 해외에서 단기 자금을 빌려다 국내 재벌에 장기로 대출하며 미스매칭 구조를 만든 1997년 IMF 외환위기 때의 전조 현상이 감지되는 대목이다. 이후 동남아시아 외환위기가 발생해 해외 투자자들이 단기자금 리볼빙을 중단한 것이 당시 종금사태로 이어졌다.

정부가 은행채 발행 막기에 나섰지만, 국내 금융사의 관심은 이미 더 낮은 금리의 해외 채권에 있어 보인다. 현대캐피탈은 지난달 26일 일본에서 200억엔(한화 1930억원) 규모의 사무라이 본드(엔화 표시 채권)를 0~1%대의 금리로 발행했다.

머니마켓펀드(MMF)에선 자산 급매 현상이 관찰되고 있다. 증권사 신탁자금과 MMF에서 자금이 유출되면  CP를 살 수 있는 여력이 축소될 수밖에 없다. 한국펀드평가 집계 결과 MMF 시장에서는 지난 한 달 사이 약 21조3227억원의 순자산이 빠져나갔다.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원은 "기업의 차환 수요가 증가하는 가운데 CP 발행이 어려워지면서 결제불이행 위험이 확산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1997년 종금사태를 영화로 만든 '국가부도의 날' 한 장면
1997년 종금사태를 영화로 만든 '국가부도의 날' 한 장면

콜옵션 미행사는 신뢰가 무너지는 행위로 인식된다. 더 큰 문제는 이 같은 지불유예 소동이 레고랜드와 흥국생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DB생명보험의 신종자본증권 조기 상환 취소 조치도 이를 기다리던 투자자에 대한 신뢰를 깨는 행위였다. 

특히 전문가들이 한국경제의 뇌관으로 지적하는 것은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시장이다. 분양 안 될 게 뻔한 프로젝트에 참가한 시행사가 넘어지고 그에 대한 지급보증을 맡은 채무가 건설사로 몰리고 있다.

지난달 호텔롯데를 대상으로 2000억원의 유상증자(주주배정증자)를 실행하고 롯데케미칼로부터 5000억원을 빌려 차환 자금을 마련한 롯데건설은 지난 8일에도 롯데정밀화학과 3000억원 규모의 금전소비대차계약을 이자율 7.65%로 체결했다.

오정근 건국대 금융ICT학과 특임교수는 "김진태 강원도지사의 레고랜드발 금융경색으로만 보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6개월 이내 만기가 도래할 단기금융시장 자금 규모만 233조원"이라고 설명했다. 또 이 가운데 현재 112조원까지 덩치를 키운 부동산 PF의 만기가 다가오는데 정부 대책은 속수무책인 상황이어서 우려를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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