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열사서 그룹으로 유동성 위기 전이
자금 여력 없는 중소사 부도 불 보듯
정부 50조 풀어도 CP 금리 고공행진

강원도청의 레고랜드 지급의무 불이행으로 촉발된 채권 파동이 전방위적으로 확산하고 있다. 롯데건설은 레고랜드 사태 직후 회사채 발행이 여의치 않아지면서 지주사와 계열사를 통해 자금 마련에 나섰다. 강원도 춘천에 위치한 레고랜드 전경 /강원도청
강원도청의 레고랜드 지급의무 불이행으로 촉발된 채권 파동이 전방위적으로 확산하고 있다. 롯데건설은 레고랜드 사태 직후 회사채 발행이 여의치 않아지면서 지주사와 계열사를 통해 자금 마련에 나섰다. 강원도 춘천에 위치한 레고랜드 전경 /강원도청

강원도청의 레고랜드 지급의무 불이행으로 촉발된 채권 파동이 전방위적으로 확산하고 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이라는 평가를 내놓은 가운데, 한국은행이 발권력을 동원해 회사채 매입 지원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26일 금융투자업계 등에 따르면, 정부의 50조원 규모의 유동성 공급 계획에도 불구하고, 레고랜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부도 사태의 진원지인 프로젝트파이낸싱(PF) 유동화 시장을 중심으로 신용경색 우려가 현실화됐다.

현재 국내 PF 자산유동화증권 만기 잔액은 연말까지 32조3908억원에 달하고, 내년 상반기까지는 총 90조원을 넘어선다. 이에 대기업은 상환 자금을 자체 조달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지만, 중소·중견사는 이러한 대응조차 펼칠 여력이 없는 실정이다.

롯데그룹이 계열사의 유동성 리스크가 그룹사로 전이된 대표적 사례다. 롯데건설은 레고랜드 사태 직후 회사채 발행이 여의치 않자 롯데케미칼과 호텔롯데를 대상으로 2000억원의 유상증자(주주배정증자)를 실행했다. 이어 지난 10월 20일엔 롯데케미칼로부터 5000억원을 빌려 차환 자금을 마련했다.

롯데건설이 보유한 현금 자산은 2022년 9월 말 현재 7000억원 규모다. 한국신용평가 집계에 의하면 롯데건설의 PF 우발채무는 약 6조7000억원에 달한다. 이 가운데 올해 만기가 도래하는 유동화 증권은 2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다시 말해 2조원의 빚을 갚으려면 지주사와 계열사를 통해 마련한 7000억과 현금성 자산 7000억 이외에도 6000억원 이상의 추가 자금이 필요한 상황이다. 롯데건설 관계자는 여성경제신문과의 통화에서 "회사채 발행이 아닌 금융사를 통한 부동산 담보 대출을 검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기업평가(KR)는 올해 상반기 기준 KR 유효 등급을 보유한 17개 건설사의 PF 우발채무 총규모는 15조8000억원으로 파악하고 있다. 문제는 재무구조가 탄탄하고 신용등급이 상대적으로 높은 롯데건설을 비롯한 다수 건설사의 PF 우발채무 가운데 미착공 사업 비중이 70%를 웃돈다는 점이다.

재무제표상 자산으로 분류되는 우발채무는 특정 요건을 충족하면 채무로 확정될 가능성이 있는 계정이다. 특히 이가운데 미착공 사업장은 수익성이 담보되지 않아 사업 진행이 멈춘 곳이기 때문에 추후 악성 채무로 전환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국내 최대 건설사인 현대건설도 레고랜드 한파를 넘지 못했다. BNK투자증권과 한국투자증권 등은 오는 28일 만기가 돌아오는 서울시 둔촌주공 PF의 자산유동화 전자단기사채(전단채, ABSTB) 차환에 실패했다. 기존 사업비 7000억원에 추가로 1250억원을 더해 총 8250억원의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발행을 시도했지만 투자자를 구하지 못했다.

회사채 시장이 급격히 위축되면서 은행문을 두드리는 기업 역시 늘어나고 있다.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대기업 대출잔액은 올해 1월부터 5월까지 14조3000억원 증가했다. 전년 동기(2조4000억원) 대비 495.8% 급증한 것이다.

또 자체 상환을 진행 중인 기업도 늘었다. 포스코건설은 만기가 도래한 1100억원의 회사채를 자체 보유 현금으로 상환했다. 삼성물산은 내달 만기 도래하는 500억원 규모의 회사채를 현금으로 갚을 예정이다. 쌍용건설도 120억원 규모 회사채를 별다른 차입 없이 자체 상환할 계획이다.

반면 그룹 차원의 유동성을 확보하지 못한 중소·중견사는 부도의 파도를 넘지 못할 전망이다. 중견 건설사 한 관계자는 "분양 수익도 기대하기 어려운 지방 사업체의 경우 언제 부도가 나도 이상하지 않는 상황"이라며 "금리 부담에 착공을 결정하고도 이후 미분양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최악의 시나리오로 펼쳐지고 있다"고 토로했다. 

현대건설이 참여한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아파트 재건축 사업 현장 /연합뉴스
현대건설이 참여한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아파트 재건축 사업 현장 /연합뉴스

빚 갚는데 급급···조달 금융 완전 마비
한국은행이 CP 매입 나서라는 주장도

국내 실물 경제를 잠식한 돈맥경화는 금융권의 시스템 리스크로 이어지고 있다. 레고랜드 사태로 PF ABCP 거래가 멈춰버리면서 정부가 집중 매입조치에 나섰지만, 기업어음(CP) 금리는 안정화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단기 자금시장의 바로미터인 CP 91일물 금리는 지난 24일 정부의 유동성 조치에도 불구하고 전 거래일 대비 0.120% 포인트 오른 연 4.37%를 찍은 뒤 25일엔 4.45%까지 올라 마감했다. 금융위기 당시인 2009년 1월(연 4.38%) 이후 최고치를 연일 경신했다.

국내 25개 증권사의 PF 신용공여 잔액은 22조289억원으로 집계되고, 여신전문금융회사의 부동산PF 규모도 약 25조원에 달하는데 연말까지 이들 가운데 약 16조원의 만기가 돌아와 기존의 빚을 갚는 것조차 어려워진 초비상 상황이다.

정부는 20조원의 채권시장 안정펀드와 비우량 회사채·CP 매입 프로그램 16조원, 유동성 부족 증권사 지원 3조원, 주택도시보증공사(HUG)·주택금융공사 사업자 보증지원 10조원 등 50조원 이상의 유동성 공급 프로그램을 시행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특히 산업은행·기업은행이 운영하는 기존 회사채·CP 매입 프로그램의 매입대상 CP 범위에 금융회사가 발행한 'A3 등급 이상' CP를 포함하면서, 중소형 증권사의 유동성 고갈 해소를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다.

다만 정책금융기관을 활용한 매입 조치는 다시 시장에서 채권발행 등을 통해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시장 금리를 안정화시키는데 한계가 있다. 이런 이유로 미국의 연방준비제도(Fed)처럼 한국은행이 발권력을 동원해 CP와 전단채 매입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이용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단순하게 금융시장만의 문제가 아니고 실물경제 전체를 흔들 수 있는 사안이어서 한국은행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의원은 구체적으로 "CP 매입기구인 기업유동성지원기구(SPV)를 한시적으로 금융기관까지 포함하여 재가동할 필요성이 있다"면서 "통화긴축정책에 어긋난 것이지만 먼저 자금시장 경색을 풀고 나서 긴축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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