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은심의 일본열도 발도장 찍기] (10)
아타미 야마구치 미술관
자카란다 피는 계절을 기다리며
여자들의 수다 모임 '합숙'
2022년, 뜻하지 않게 얻은 긴 휴가철에 열심히 돌아다녀서일까. 겁쟁이인 내가 조금 성장했음을 느낀다. 누군가에게 의존하려 하지 않고, 휩쓸리지 않고 바로 서려 하고, 혼자 움직이려는 내가 있다. 미소가 번진다.
1월 중순. 코로나 규제가 풀린 기회에 친구들과 1박 여행에 나섰다. 나를 포함해 9명이다. '합숙'이라는 이름의 '신년회'. 목적지는 시즈오카현(静岡県) 아타미(熱海)에 있는 호텔이다. 우리 팀의 환갑 축하 장소로 애용하는 곳이다. 집에 갈 걱정 없이 맛있는 요리와 술과 수다를 즐기는 여행.

여행에 재미가 붙은 나는 살짝 용기를 냈다. 역 주변 뿐이기는 하나, 아타미는 익숙한 곳이다. 팀원들과는 현지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역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미술관을 검색했다. '아타미 야마구치 미술관(熱海山口美術館)'이 뜬다. 오카모토 타로의 작품이 있단다. 일찍 가면 합류 전에 볼 수 있겠다. 절약도 하고 철도 여행의 맛도 즐길 겸, 로컬 열차를 이용하기로 했다.
여행 당일. 전날까지 마무리하려던 작업이 늦어지는 바람에 일찍 출발하겠다는 계획은 틀어져 버렸다. 미술관에 들를 시간은 없다. 열차 안에서 카페를 검색했다. 역 주변에 옛날 집을 리모델링한 카페가 있었다. 가보자. 합류 시간까지 1시간.

카페에 들어서니 2층으로 안내한다. 노부부 한 팀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나와 같은 열차를 타고 온 중년 부부가 막 자리에 앉고 있었다. 허브티를 주문하고 문고판 책을 꺼냈다.『도쿄 23구 이야기(東京23話)』. 각 구(区)가 화자(話者)가 되어 동네의 역사를 들려주는 책이다. 아타미 여행길에 도쿄 관련 책을 들고 가다니 하하. 결국 조금 읽다가 책을 덮었다. 그 공간을 만끽하고 싶어서.

호텔에 도착하여 수다 좀 떨고 나니 저녁 식사다. 다들 화장을 고치며 준비한다. 새 옷을 샀다는 친구도 있다. 이 여행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나는 어떤고 하니, 코로나 시대를 살아오며 좀 많이 수수해졌다. 친구가 시간이 남았다며 나를 앉혀놓고 연지 곤지 발라준다. 꼭 소꿉장난 같다. 쑥스러워서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마스크를 벗어도 되는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 얼굴을 드러내야 한다. 나는 내 얼굴을 볼 일이 없으니 창백하건 칙칙하건 상관이 없다. 그러나 나와 마주해야 하는 사람은? 적당한 화장은 예의라는 말을 새삼 떠올랐다. 남을 불편하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진수성찬을 만끽하고 돌아와 방에 붙은 노천탕에 몸을 담갔다. 대욕장에 간 친구들이 돌아오는 것도 못 보고 잠들어 버렸다. 로컬 열차를 이용해서인지, 오래간만에 장거리 이동을 해서인지, 아주 피곤했던 것 같다. 수다 떠는 게 '합숙'의 맛이련만···.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조식을 만끽하고 호텔을 출발했다. 카운터 뒤에 숨듯이 자리하고 있는 매점에서 쇼핑을 했다. 조식에 나왔던 레몬 향 올리브 오일과 머그잔 하나. 머그잔은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다. 삶은 달걀을 연상하게 하는 디자인과 촉감이 마음에 든다.
역에서 친구들을 배웅했다. 이제 자유 시간이다. '아타미 야마구치 미술관'까지 걸어서 17분이란다. 걷다 보니 벚꽃이 보였다. '아타미자쿠라(熱海桜)'다. 1월 중순에 벚꽃이라니. 걸어오길 잘했다는 생각과 함께 괜히 흥이 솟는다.

미술관에 도착하니 입구에 서 있는 오카모토 타로의 '갓파'가 두 손을 펼치고 인사를 한다. 익살맞은 모습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작은 아파트 1층과 2층을 개조해서 만든 미술관이란다. 간단한 설명을 듣고, 전시실 입구에 있는 '동탁(銅鐸)'을 두드리는 것으로 관람 시작이다.
동탁을 두드려 보라니. 이 시작부터가 새로웠다. 11개의 방 하나하나를 돌며 '이렇게도 미술관을 할 수 있구나' 신기했고, 작품 수에 놀랐다. 넓은 공간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과 함께, 이런 공간이 있음에 감사하는 내가 있었다.

'배움이 있는 미술관'을 목표로 2020년 12월에 개관했단다. 르누아르, 피카소, 샤갈, 조르주 루오, 쟝 쟌셈, 앙드레 브라질리에, 오카모토 타로, 이우환, 쿠사마 야요이, 나라 요시토모, 뱅크시, 요코야마 다이칸 등의 작품 2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오카모토 타로의 작품은 그가 큰 영향을 받았다는 피카소의 작품과 함께 전시되고 있다. '앉을 것을 거부하는 의자'라는 작품에는 실제로 앉아 볼 수도 있다. 편안하지 않다. 오래 앉아있지 말라는 메시지가 전해져 온다. 빨리 일어나서 움직이라고?
미술관 1층에 있는 카페에서 말차(抹茶)를 주문하면 인간 국보(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가 만든 찻잔에 내어 온다는데 나는 커피를 주문하는 바람에 기회를 놓쳐 버렸다. 분명 미술관 안내에서 봤는데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이런 낭패가 있나. 뭐, 커피를 마시고 싶은 기분이었겠지.
작은 접시에 유성펜으로 그림을 그리면 구워주는 체험도 있다. 아타미 여행 기념으로 나만의 접시를 가지고 싶다면, 체험해 봐도 좋겠다. 단, 단순한 그림을 권한다. 나는 욕심을 내서 후지산을 온통 색칠해서 그려 넣었더니 실망스러운 결과가 되었다. 옆자리 커플은 알록달록 귀여운 그림이었다. 그들이 정답이다.

커피를 마시며 밖을 보니 비가 온다. 택시를 불렀다. '갓파'의 배웅을 받으며 택시에 올라탔다. 친절한 운전사가 조곤조곤 아타미에 대해 들려준다. 아타미자쿠라 이야기가 나와서 내가 꽃을 좋아한다니, 6월 중순에 '자카란다'라는 꽃의 페스티벌이 있으니 꼭 한번 와보란다. 사진을 보니 연보라색 꽃이 능소화를 닮았는데 호리호리하다. 커다란 나무에 피어있는 꽃이 풍성하다. 탄성이 터진다. 자카란다 피는 계절에 다시 한번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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