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은심의 일본 열도 발도장 찍기] (1)
30년 살아 정든 제2의 고향인데
정작 방문해본 곳 손에 꼽을 정도
나홀로 일본 발도장 찍기 시작한다
'나 홀로 여행'이라는 말에 꽂혔다. 마스다 미리의 『아름다운 것을 보러 가는 단체여행, 나 홀로 참가』라는 책을 읽고부터다. 작가가 혼자서 여행사 투어에 참가하여 해외여행을 하는 이야기다. 2021년 여름이었다.
슬슬 여행 좀 해보자 했을 즈음 코로나19가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1년여가 지나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일 어찌될 지 모르는 게 인생이고, 짧다면 짧은 인생이다. 언제까지나 코로나가 끝나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코로나면 어때 조심해서 다니면 돼"라는 식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일본에 살면서도 일본을 제대로 여행해 본 적이 없어서인지 종종 나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지곤 했다. 초조하기도 했다. 나는 뭘 하고 있는가 라고. 블로그의 영향이리라. SNS의 세상에 들어가 보면 일본에 사는 나보다 한국에 사는 사람들이 더 일본을 여행한다. 일본에서 여행하기 좋은 곳에 대해 물어와도 아무런 대답을 해 줄 수 없는 나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나 또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주도 출신이면서 제주도의 어디가 좋다고 소개할 수 없는 나다. 바다와 산이 좋다는 말 외에는. 오히려 관광객들의 정보에서 제주의 소식을 접한다. 친정에 가도 관광지에 가기보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니 제 머리 깎기는 애초에 글러 먹었다.
헌데 요즘은 전기바리캉으로 제 머리를 깎을 수 있는 시대다. 나도 바뀌고 싶었다. 코로나19로 한국에 갈 수 없게 된 틈을 타서 일본열도에 발자국을 찍어보자는 계획을 세웠다. 일본에 사는 나로서는 국내 여행인 셈이다. 일본에서의 삶이 벌써 30년이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시간보다 일본에서 살아온 나날이 더 길어졌다.
한국에 갔을 때 일본에서 온 사람인 줄 알았다는 말을 듣기 시작한 지 오래다. 최근에는 일본에 사는 여동생으로부터 멀리서 보니 꼭 일본사람 같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겠지. 30년 살다보면 물들기 싫어도 자연스레 물이 든다.
내가 사는 땅을 돌아보고 싶어졌다. 때마침 긴 휴가가 생겼다. 두 달에 가까운 기간이다. 금쪽같은 장기 휴가. 그냥 흘려보내기는 너무 아까웠다. 프리랜서인 나는 들어오는 일을 거절하면서까지 쉴 용기가 없다. 그래서 거래처의 사정으로 쉬게 되었을 때의 해방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거절하지 않고도, 미안해하지 않고도 푹 쉴 수 있는 행복이라니.
한창 아이들 교육비가 들어갈 시기의 긴 휴가는 청천벽력이었다. 프리랜서에게 휴가란 '수입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노후에 한국에서 쓸 요량으로 모아놓았던 쌈짓돈까지 교육비에 쏟아 넣으며 전전긍긍하던 때도 있었다. 키워야 할 아이들이 있었을 때의 휴가는 '해고'의 의미로 다가왔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 키웠다. 젖 달라고 징징대는 아이는 없다. 한동안 일을 쉰다는 것은 말 그대로 '휴가'가 되었다.
여행을 준비하며 아이들이 썼던 일본 지도책을 꺼냈다. 2006년에 발간된 책이다. 헌책을 정리할 때마다 버리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무의식적으로 쓸 날이 올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나 홀로 여행을 시작하며 거창하게 '일본열도에 발자국 남기기'라는 나만의 프로젝트를 내걸었다. 이 계획은 아이들이 어렸을 때도 품은 적이 있었다. 막연하게나마 언젠가 돌아볼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한국의 팔도도 돌아보지 못했으면서 뭘······'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우선 한국부터 돌아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더군다나 일본은 47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뉜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기간이 걸릴지 막막하기도 했다. 하루하루 일상에 치이며 사는 동안 점점 일본 전국을 돌아본다는 일에 흥미를 잃어갔다. 자연스레 일본열도를 돌아본다는 생각을 접었다. 안한다고 선언까지 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코로나 사태가 접었던 생각에 불을 붙였다. 뭉쳐 다니지 말라면 혼자 다니면 되지. 한국에 가지 못하면 일본열도를 돌아보면 되겠네. 잊고 있었던 꿈을 꺼내왔다.
마스다 미리의 『47도도부현 여자 혼자서 가보자』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절묘한 타이밍. 그래 맞다. 여자 혼자여서 안 될 건 없다. 가면 되는 거다. '여자 혼자'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는 시대도 아니다. 느슨하게 어슬렁대는 작가의 여행기를 읽으며 나의 여행을 계획했다. 작가가 간 곳을 찾아다닐 필요는 없다. 그저 그 마음가짐을 흉내 내고 싶었다. 느슨하게 자유롭게 떠나는 여행.
며칠 전부터 노선을 확인했다. 나는 갈아타는 걸 싫어한다. 한 번에 갈 수 있으면 30분 정도 더 걸려도 그쪽을 택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번엔 갈아타지 않으면 갈 수가 없는 곳이다. 다른 현(県)으로 가야 하니 당연한 일이다.
아직 서투른 여행자. 잘 할 수 있을까 불안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한다. 최악의 상황이 되더라도 '말이 통하는데 뭐'라고 배짱도 부려본다. 실패해도 좋다는 각오로 집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올 수만 있으면 된다고.
양은심의 '일본열도에 발도장 찍기'가 시작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