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은심의 일본열도 발도장 찍기](3)
시즈오카 현 이즈시모다(伊豆下田)
매튜 페리가 개국을 요청한 곳
도망친 사카모토 료마가 용서받은 곳
쉴 새 없이 다가오는 일상. 어깨를 누르는 삶의 무게들. 눈 떴다 싶으면 어느새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날이 길어지면, 이대로 소멸해 버릴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폭발할 것 같은 지경을 넘어 숨도 못 쉬고 시들고 말라서 먼지처럼···. 그럴 때마다 조금 긴 휴가를 얻게 되는 건 삶의 수수께기 중 하나다. 하늘은 내 편이라 믿어질 만큼 절묘한 순간에 다가온다.
집에서 벗어날 궁리를 시작한다. 바다다. 해돋이나 석양을 볼 수 있으면 금상첨화다. 욕심을 부린다면 방에서 바다가 보이는 조금 넓은 방 하나. 바다보다 산을 좋아한다. 산이라 해도 등산이 아니라 산길을 걷는 게 좋다. 그런데 내 맘이 소망하는 건 산이 아니라 바다였다. 코로나19로 내 고향 제주의 바다를 못 본 지 2년이 넘었다. 좋은 경치도 좋은 음식도 아닌 그저 바다를 볼 수 있으면 족했다.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시즈오카 현(静岡県) 이즈시모다(伊豆下田)로 결정. 일하는 사이사이 검색에 검색을 거듭하여 뒷마당이 바로 바닷가인 리조트 호텔을 찾아냈다. 이 때는 올 2월에 돌아가신 시아버지를 모시고 있을 때였다. 20년 이상을 재택근무자로 살면서 시부모와 동거를 해 왔고 수년 전부터는 그야말로 '모시다'였다. 가족들이 역할 분담을 하여 잘 해내고 있었다. 그런데도 가끔은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다. 호텔을 예약하고 가족에게 전했다. 세 밤만 자고 오겠다고.

시즈오카 현 이즈시모다. 1853년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매튜 페리가 개국을 요청한 곳으로 유명하다. 이때는 에도 막부의 거절로 포기했으나 다음 해 1894년에 다시 와서 결국 미일화친조약을 맺는다. 역 앞에 있는 '흑선' 장식물을 보며 역사적인 곳임을 실감했다. 배를 검게 칠하고 있다 하며 '흑선'이라 했다고 한다. '흑선(黒船/구로부네)'은 일본에서는 '페리'와 '개국'을 연상하게 하는 말이다.

도쿄에서 출발하여 3번의 환승을 거쳐 4시간 반 만에 도착했다. 호텔에 가면 밖으로 나올 생각이 없는 나는 역 주변에 있는 관광지들을 둘러보기로 했다. 우선 페리가 개국을 요청할 때 배에서 내려 걸었다는 '페리 로드'로 향했다.
걷다보니 일본 근대시대의 개막에 공헌했다는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기념관이 있는 절이 보였다. 호후쿠지(宝福寺). 마당에 있는 큰 목상이 눈길을 끌었다. 이 동네 출신이 아닌데 '여기서 뭘 했지?'라는 궁금증을 품고 들어섰다.

호후쿠지는 사카모토 료마가 도사번(土佐藩)을 뛰쳐나와 도망자 신세였을 때 번주로부터 용서를 받아 다시 활동하게 된 역사적인 곳이란다. 사카모토 료마가 소속했었던 도사번의 번주(藩主)가 이 절에 묵고 있었다. 소식을 들은 정치가 가츠 카이슈(勝海舟)는 번주를 찾아가 마시지도 못하는 술까지 마셔가며 부탁했다고 한다. 자기가 데려갈 테니 도망친 것을 용서해 주라고. 그 에피소드가 그림으로 재현되어 전시되고 있다.

'페리로드'는 코로나19로 문 닫은 가게가 많아서인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역사적인 곳이지만 특별한 감흥은 없었다. 페리 로드에서 점심을 먹겠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역 주변으로 돌아와 회덥밥을 먹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 있는 네스가타 산(寝姿山) 전망대에 올랐다. 일본에 개국을 요청하는 서양의 선박들이 드나들었을 바다. 그 선박들을 감시하던 곳을 보며 1800년대 후반 일본의 상황을 잠시 떠올려 보기도 했다. 미국과 조약을 맺은 걸 보고 러시아도 요구해 와서 조약을 맺었다는 등등의 이야기들.

자! 드디어 예약한 호텔로 향한다. 택시를 탔다. 방향감각도 없고 여행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툭하면 택시를 탔었다. 여행을 시작하고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이 버릇은 사라졌다. 손품 발품을 들이는 법을 알아가고 있다.
바다가 보고 싶어 왔다는 나에게 택시 운전사는 아쉽다는 듯 말한다. 오늘은 파도가 높아서 에메랄드 색은 아닐거라고. 파도가 없는 날은 기가막히게 이쁘다고. 그래도 비가 안 와서 다행이라는 말을 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리조트 호텔이어서인지 가족과 커플, 서핑을 즐기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갑자기 새로워지는 휴가 기분. 체크인을 하고 방으로 가자마자 테라스로 나갔다. 검색 창에서 본 대로 뒷마당이 바로 바다였다. 바다도 이쁘구먼. 응응 대만족. 탁 트인 바다와 콧속으로 들어오는 바다 내음. 이거다. 끝없이 펼쳐지는 수평선. 두고 온 일상을 한순간에 잊게 해 주었다.

집을 떠난 하루가 끝나간다. 저녁은 호텔 레스토랑에서 해결하고 방으로 돌아와 어두워가는 바다를 보며 파도 소리에 몸을 맡겼다. 소리가 참 찰지다. 철썩 싸아~ 철썩 싸아~···.
수평선으로 올라오는 아침 해가 보고 싶어서 커튼을 열어놓고 잤다. 해 뜨는 시간은 5시 22분이란다. 일출과 일몰을 좋아한다. 건물들 사이로만 보다가 드디어 바다 일출이다. 구름이 아쉽기는 하지만 족하다. 바다와 하늘과 아침 해. 회색 사이를 뚫고 오렌지색으로 물드는 하늘과 수평선. 얼굴을 들어 심호흡을 한다. 새 날이 밝았다.

관련기사
- [양은심 더봄] 자유의 여신상보다 3배 큰 불상을 보다
- [양은심 더봄] 엄마·며느리는 졸업···이젠 내 맘대로 살래~!
- [양은심 더봄] 일출을 볼 수 있는 전철역
- [양은심 더봄] 표고 1600미터에 있는 에메랄드빛 호수
- [양은심 더봄] 깊은 산골 '긴잔 온천(銀山温泉)'
- [양은심 더봄] '타샤 튜더 뮤지엄 재팬'을 가다
- [양은심 더봄] 히로시마 평화공원에서 우크라이나를 위해 기도
- [양은심 더봄] 오키나와···토지가 다르면 풍습도 달라진다
- [양은심 더봄] 점점 볼거리가 늘어가는 아타미(熱海)
- [양은심 더봄] 도쿄, 우에노 공원, 꽃놀이 삼종세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