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은심의 일본 열도 발도장 찍기] (17회)
안개 속의 산책, 센조지키 칼, 나가노현(長野県)
액땜하고 온 후지산 고고메(五合目), 야마나시현
세차게 내리치는 빗소리가 반가웠다. 뽀송뽀송한 집 안에서 반소매 밑으로 뻗은 팔을 쓰다듬으며 느끼는 편안함. 비바람을 막아 줄 지붕과 벽이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8월 내내 불더위였던 것도 모자라 9월에 들어서까지 35도에 육박하는 맹위를 떨쳤던 올여름. 드디어 백로다. 여름도 양심이 있으면 물러서겠지.
문득 비 때문에 힘들었던 여행이 생각났다. 여행 초보자인 나는 8월 말부터 태풍이 시작된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아니 알고는 있었으나 여행에 적합하지 않다는 걸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작년 여름까지는. 그저 열심히 놀 생각만으로 가득했었다.
2022년 8월 말. 목적지는 나가노현(長野県) ‘센조지키 칼(千畳敷カール)’이다. 다다미 천장을 깔아 놓은 듯 평평하고 넓은 곳. 그곳에는 한여름에도 꽃이 만발하다고 했다.
2만 년 전 빙하기 때 얼음에 의해 생겼고 움푹 팬 사발 모양의 지형이다. 표고 2612m에 있는 야생화의 천국. 고산식물이 많기로 유명하단다. 푹푹 찌는 도쿄에서 탈출한다. 즐겁지 아니할 수가 없다.

관광버스와 노선버스 그리고 로프웨이를 타고 목적지에 도착. 일본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역에 내리니 바로 ‘센조지키 칼’이었다. 구름 사이를 뚫고 오르는 로프웨이에서 각오는 했다. 상상했던 경치는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역시나 안개인지 구름인지가 내려앉아 있었고 보슬비까지 오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며 도시락을 맛있게 먹겠다는 계획은 무참하게 무너졌다. 도중에 받은 뜨끈뜨끈했던 도시락은 표고 2612m로 이동하는 동안 차갑게 식어 버렸다. 게다가 비까지 내려서 춥기까지. 이럴 줄 알았다면 도시락 신청하지 말고 삼각김밥이나 사 올 걸. 편의점 삼각김밥은 식어도 맛있기라도 하니까.
궂은 날씨에도 개별적으로 온 등산객이 있었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상관이 없나 보다. 신나 보이기까지 한다. 도쿄 방면에서 온 우리 일행도 쉬이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니 망설임 없이 나선다. 나 홀로 참가여서 안개 자욱한 곳에서 길을 잃으면 곤란하다. 앞서가는 사람들 뒤를 따랐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는 건 포기했다. 하지만 어쩌면 몽환적인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작은 신사를 통과하여 코스로 들어서자마자 두 눈이 커지고 탄성이 새어 나왔다. 자욱한 안개 밑에 꽃밭이 펼쳐지는 게 아닌가. 세상에 이럴 수가! 앞으로 나갈 용기가 생겼다. 안개인지 구름인지 그 속으로 들어간다. 촉촉한 공기 속에서 시간을 들여 심호흡했다. 악천후가 준 최고의 선물이었다.

길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발밑만 보며 걸어도 길을 잃는 일은 없겠다고 생각하니 사람 꽁무니를 쫓던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이제부터는 오롯이 나 홀로의 시간이다. 발걸음이 느려진다. 새소리 물소리가 내 몸을 통과한다. 귀 기울이면 안개 소리까지 들릴 것 같다. 이슬 머금은 꽃들. 힘차게 흐르는 물소리. 그리고 새소리. 날씨가 맑았으면 꽃 천지였을 이곳. 새록새록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에고 다음에 또 오라는 거겠지.


40~50분 정도 걸었나 보다. '센조지키 칼'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이쪽이 정문인 셈인가? 라는 생각을 하며 조금 더 걸어가니 역 건물이 보였다. 건물 안에 있는 ‘센조지키 카페’에 들어갔다. 표고 2612m에 있는 카페다.
커피를 주문하고 마침 비어있는 창가에 앉았다. 눈앞에 장관이 펼쳐질 터인데 역시 안개에 싸여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따듯한 커피로 몸을 녹였다.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으니 아쉽기만 했다. 다시 온다면 꽃 피는 봄이 좋겠다. 그리고 추억하겠지. 안개에 싸인 센조지키 칼의 몽환적인 풍경을.


2022년 9월 2일. 후지산 고고메(五合目)에 가는 날. 표고 2305m까지 관광버스로 올라간다. 그저 후지산을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그런데 날씨가 엉망이다. 자유여행이었으면 취소했을 터인데 그럴 수도 없다.
한참 동안 꾸불꾸불 후지산 속을 달려 고고메에 도착했다. 비까지 내려서 내리지 말고 책이나 읽을까 하다가 다리도 펼 겸 내렸다. 커다란 건물과 주차장과 시멘트로 정비된 넓은 광장이 있었다. 산속을 상상하며 왔는데 완전 상업지역 뺨치는 광경이었다.

비는 오고 먹구름은 가득하고. 후지산은커녕 주변 경치도 보이지 않았다. 뭐 하러 왔는지 참. 첨승원은 당연한 듯이 집합 시간을 알리면서 사람들을 버스 밖으로 내몰았다. 아니 안내했다. 대체 뭘 보라는 건지. 후지산에 있는데 후지산을 볼 수 없는 희한한 상황.
신사가 대여섯 개는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눈에 보이는 건 큰 도리이 하나뿐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산책도 할 수가 없다. 여름용 운동화는 발이 젖는다고 생각할 새도 없이 빗물을 받아들였다. 순식간에 발이 젖었다. 문득, ‘나 후지산 물로 발 씻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오호~! 그러네~. 후지산 물로 발만 목욕재계했네 하하하.’ 그렇게라도 위안으로 삼아야 했다.

버스로 돌아가려고 발을 내디딘 순간···! 기억이 없다. 내 다리가 장애물을 뛰어넘을 때의 허들 선수 같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을 뿐. 그리고 "아이고 미끄러졌네···" 라는 누군가의 말. 등산화와 운동화를 놓고 고민하다가 운동화를 신는 바람에 일어난 사고다. 나의 선택을 원망했다.
정형외과를 찾았다. 결론은 무릎 반월판을 다쳤다는 거였다. 길게 가면 3개월은 걸리니 느긋하게 기다리란다. 처방은 진통제가 들어있는 파스와 무릎 보호대. 특효약은 없단다.
나에게 '후지산'은 제대로 액땜하고 온 곳이다. 새해 첫날이면 많은 사람이 후지산에 오른다. 올해는 70세를 넘으신 분이 등반에 성공하고 소원을 풀었다며 감동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절대 ‘나도!’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후지산은 멀리서 바라볼 때가 가장 아름답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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