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의 그랜드 투어]
“프랑스만 아니면 돼” 속사정
맛없고 멋없다니 억울한 영국 음식
기록하고 정의하는 정복의 역사

잉글리시 브랙퍼스트(English Breakfast)는 특별한 조리법이 없이 기름에 구워 내는 음식이다. 영국 음식은 맛이 없는 것으로 악명이 높지만 열량이 풍부하고 든든한 특징이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잉글리시 브랙퍼스트(English Breakfast)는 특별한 조리법이 없이 기름에 구워 내는 음식이다. 영국 음식은 맛이 없는 것으로 악명이 높지만 열량이 풍부하고 든든한 특징이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영국 음식은 먹고 토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개구리 뒷다리나 먹는 프랑스 놈들이 헛소리는.”

프랑스와 영국의 앙숙 관계는 만만찮다. 지독한 미움의 뿌리는 숭배에 있다고도 하지만 양국 관계는 한국과 일본만큼이나 역사가 깊고 독하다. ‘프랑스만 아니면 돼’ 정서가 100년 전쟁에서 비롯되었다는 해석이 지배적인데 실은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간 역사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통성 콤플렉스가 있는 영국인들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왕조 시원의 역사라고 할까?

백제의 왕족이 일본으로 건너가 천왕이 되었다는 설이 있고 일본 역사가들은 펄펄 뛰며 오히려 백제가 ‘왜’의 제후국이었다는 주장으로 맞서고 있지만 영국의 정복왕 윌리엄 1세가 프랑스 귀족의 사생아 출신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노르망디 귀족 사생아 영국 왕이 프랑스 왕조의 신하를 겸했다는 것도 엄연한 역사다. 죽을 때까지 영어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은 프랑스인 영국 왕. 11세기 이후 1000년 동안 여러 왕조를 거쳐 현대 윈저 왕조까지 프랑스 귀족 사생아의 후손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도저히 기분 좋을 수 없을 프랑스 콤플렉스일 것이다. 

14세기와 15세기 116년간 전쟁을 벌였고, 제국주의 패권을 놓고 경쟁하며 싸운 두 나라는 지금도 서로가 위장 호의에 속지 않는 재밌고도 살벌한 라이벌이다. 패션과 영화는 프랑스가 금융과 대중음악에서는 영국이 우세를 잡고 골고루 많은 분야에서 어깨를 겨루지만, 이견 없이 세계 최고 대 최악으로 비교되며 영국에게 백전백패를 안기는 분야도 있다. 요리, 음식이다.

영국의 대표 음식 메뉴 피시앤칩스(Fish and Chips)는 도시 노동자들을 위한 가벼운 간식 끼니로 처음 생겼다. /게티이미지뱅크
영국의 대표 음식 메뉴 피시앤칩스(Fish and Chips)는 도시 노동자들을 위한 가벼운 간식 끼니로 처음 생겼다. /게티이미지뱅크

영국에 가면 먹을 것이 없다는 얘기를 수없이 들었지만, 런던에서 먹은 음식은 의외로 맛있고 정겨웠다. 피시 앤 칩스(Fish and Chips)는 영국의 대표 메뉴답다. 말 그대로 어디서든 팔고 어디서든 먹을 수 있다. 흰 살 생선튀김과 감자튀김은 공장 노동자 계급을 위한 음식이었다고 한다. 종이에 둘둘 말아 싸주는 대구 튀김과 감자 칩을 먹으면서 산업혁명으로 새로 생겨났던 도시 노동자를 떠올리자면 너무 진지한가?

잉글리시 브랙퍼스트(English Breakfast)는 원재료를 모두 기름에 굽는 것이다. 계란, 소시지, 버섯, 토마토, 빵, 베이컨을 모두 굽고 베이크드 빈과 함께 먹는 열량 높고 든든한 음식이지만 딱히 특별한 요리를 위한 조리법은 없다. 고기로 속을 넣어 만든 미트파이(Meat Pie)나 선데이 로스트까지 영국 음식은 직설적이다.

음식은 에너지와 열량이면 된다는 식이다. 정교한 조리법에 플레이팅까지 요리가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프랑스와 다른 점이고 확실히 멋도 없지만 끼니로 충실하다. 경험으로 보자면 영국 음식을 두고 맛없고 멋도 없어 먹고 삼킬 수 있으면 다행이라는 표현은 아무래도 조금 가혹하다. 음식은 영국이 원조임을 주장하지 않는 유일한 영역이다.

런던을 여행하면 자기 역사를 쓰는 것에 대한 생각이 깊어진다. 기록을 남기고 자기 방식대로 정의하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런던 국회의사당을 빼놓을 수 없다. 빅벤은 마치 ‘의회 민주주의 역사를 보여주마’ 하고 다짐한 듯 보인다. 출입구로 들어가면 1215년 마그나카르타 승인 기록화를 배치해 두었다. 왕의 통치 권한은 법에 따라서 이루어진다는 사상이 프랑스대혁명에 영향을 끼쳤으니 민주주의의 시발은 영국이라는 선언이다.

의회 광장에는 처칠을 비롯한 영국 총리 8인의 동상과 함께 에이브러햄 링컨, 마하트마 간디, 넬슨 만델라의 동상이 있다.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을 주도하고 민주주의를 이끈 사람들과 함께 최근 여성 운동가 게럿 포셋의 동상까지 세워서 영국이 인류를 구원한 정치 민주주의의 역사를 이끌어 왔다는 것, 런던 의회 광장이 그 역사의 상징임을 선언하는 증거인 것이다. 

타워브리지. 빅토리아 여왕 시절 현수교와 도개교를 결합한 방식으로 산업혁명의 완성을 상징하는 건축물로 지어졌다. /게티이미지뱅크
타워브리지. 빅토리아 여왕 시절 현수교와 도개교를 결합한 방식으로 산업혁명의 완성을 상징하는 건축물로 지어졌다. /게티이미지뱅크

정복왕 윌리엄이 세운 런던탑은 오랜 역사를 지나는 동안 음산한 감옥이자 고문실이었다. 영국의 종교를 바꾸고 세계 역사를 바꾼 엘리자베스 1세를 낳은 앤 불린이 처형당한 곳이기도 하다. 공포의 상징이었던 역사적 장소는 영국 대관식에서 사용되는 왕관을 포함해 2만 점이 넘는 왕권과 보주의 수장고 역할을 하면서 관광지의 대표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타워브리지는 인류 문명의 역사를 바꾼 산업혁명을 상징한다. 19세기 후반 산업혁명의 완성을 보여주기 위해 수력 엔진으로 다리를 들어 올리도록 설계한 건축물은 이제 런던의 야경 명소가 되었다.

영국이 주장하는 정통, 기준, 대표성을 모두 합쳐도 런던 동쪽에 위치한 그리니치 왕립천문대를 넘어설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시된 시간과 시계의 표준이 되는 곳, 세계의 날짜와 시간을 정의하는 본초 자오선이 레이저로 좌우의 경도를 나누고 있는 곳, 지구의 공간과 시간을 정의한 그리니치 표준시 GMT의 그리니치 천문대야말로 런던이 지구의 중심이며 세상의 기준이라고 외치고 있지 않은가.

그리니치를 뒤로하고 돌아오며 세상 모든 것을 기록하고 해석함으로써 스스로 기준이 된 영국을 생각했다. “역사는 내가 정의하는 것. 세상의 모든 기준은 나야 나.” 런던에서 가슴에 새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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