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의 그랜드 투어]
세상을 떠나면 나무가 될래
영원히 머물고 싶은 곳으로
금지된 프로젝트 연습 여행

(지난회에서 계속) 세상의 모든 소리를 빨아들이는 거대한 진공관처럼 호수는 고요하고 막막하다. 믿기 힘들 만큼 멍한 고요 속에 세찬 바람이 밀려오고 소용돌이쳤다.
테카포 호수를 마주하고 선 우리의 몸은 거리에 세워 둔 광고 조형물 풍선처럼 휘청거리는데 높고 우람한 비의 밍기뉴는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뿌리를 지구 한가운데까지 내리고 있는 것처럼 서 있었다.
비는 나무 주변을 돌았다. 두 발로 흙을 밟아 다지듯 툭툭 치고 그늘을 벗어나 누워 나무 끝을 바라보기도 했다. 아무래도 그곳을 떠날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죽은 동생을 다시 만난 것처럼 행복하다는 비를 재촉하기가 힘들었지만, 마냥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가자~ 돌아가는 길이 밀리기라도 하면 안 되잖아. 이제 출발해야 해.”
하루 종일 바라보기만 해도 지겨울 것 같지 않은 잉크 우윳빛의 에메랄드 호수, 머물기도 떠나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호수가 점점 멀어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귀국행 비행기를 타러 크라이스트처치로 가야 한다. 왔던 길을 되돌아 켄터베리에서 북동쪽으로 스테이트 하이웨이 79번과 1번을 타고 곧바로 가면 3시간이 좀 넘게 걸릴 것이다.
크라이스트처치에서 한국으로 가는 직항은 없고 도쿄를 거쳐 가는 경유하는 비행기이다. 공항에서 대기하는 시간까지 합치면 지금부터 24시간이 지나야 인천에 도착할 것이다. 서울에 있는 나의 밍기뉴를 확인해야 우리 프로젝트가 끝난다. 빠듯할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휴가 5일이 거의 다 지나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 여행의 마무리는 언제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여행이 아니라 가출이거나 출가라고 불러야겠지. 인생도 여행과 같아 우리는 삶의 끝에서 우리가 왔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몸을 버리고 돌아갈 그 곳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다른 차원의 존재로 세상에 남을 방식은 정했다. 말은 좀 이상하지만 밍기뉴는 우리의 ‘인생 나무’ 혹은 ‘다음생 나무’다. 세상에 남길 우리 분골의 일부가 묻힐 나무, 이를테면 ‘내 영혼이 영원히 머물 나무‘이니까.
저마다 인생 무엇이 있다. 사람들은 인생 여행을 하며 인생 사진을 남기고 인생 책, 인생 영화, 하다못해 인생 피자를 먹었다고도 말하는데 인생 나무, 다음 생 나무를 가지겠다는 것이 이상할 것은 없지 않겠나?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지만 밍기뉴 여행이 고되고 힘들기는 했다.
“엄마 찾아 삼만리, 영화 하나 찍은 거 같다.”
“삼만리라고 해봐야 1만2000킬로미터도 안 될껄? 우리 그 영화 두 개는 찍었어.”
인천에 도착하니 지난 며칠이 꿈만 같았다. 시드니 센트럴 파크와 뉴질랜드 테카포 호수에 있는 진과 비의 밍기뉴를 확인하기 위해 이동한 거리를 생각하면 눈꺼풀이 짜릿하게 아픈 피로감은 당연했다. 공항에 있는 호텔 방으로 들어가 큰 대자로 엎어졌다. 내일은 우리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는 날이다.

서울 지하철 5호선 광나루역에서 1번 출구로 나와 광장초등학교를 지나면 카페와 맛집이 나타난다. 등산로 표식을 따라 사람들은 주말농장을 만들고 배추와 무, 방울토마토를 키우고 있었다. 삶의 분주함을 지나며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등산해야 하는 거였어? 서울에 있어서 쉬운 거라더니 제일 힘드네. 평지에 있는 나무로 했어야지.”
아차산은 해발 300m도 되지 않는 야트막한 산이지만 그래도 산은 산이다. 나의 밍기뉴가 있는 아차산성 4보루까지 올라가는 길에서 친구들이 힘들다고 투정했다.
아차산 등산로의 풍광은 의외로 장대하다. 북한강에서 두물머리, 김포로 흐르는 한강을 따라 동서남북이 모두 보인다. 아차산 정상을 지나 보루에 오르는 계단 끝에 팥배나무 두 그루가 있다. 내 삶의 반 이상을 이 동네에서 살았고 나는 힘들거나 좋을 때 이 산에 올랐다. 그때마다 나를 반겨주던 나무가 바로 나의 밍기뉴이다.
다정하게 둥근 수형을 만들며 자란 나무는 뒤로 한강을 흐르게 두고 오른쪽 명품 소나무들과 조금 떨어져 있다. 팥배나무는 조경을 위해 심을 만큼 값비싼 나무가 아니다. 감탄할 만큼 아름답지만 도둑질 염려가 없다. 제 수명을 다할 때까지 이곳에 있다가 사라질 수 있다는 것도 맘에 들었다. 다만 사람들이 제법 많이 다니는 통로에 있어 프로젝트 수행을 위해서 접근은 까다로울 수도 있다.
“늦은 시간에 올라오면 되지. 한강 야경도 보고. 사람들 눈에도 덜 띄게 할 수 있고.”
“맞아. 그리고 확인해 보니 흙은 부드럽네. 충분히 가능하겠어.”
보루에 올라 가쁜 숨을 토하며 비와 진이 나무를 둘러보며 말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우리는 깔깔 웃었다.
2023년 올해가 시작되는 날, 나는 지난날 친구들과 함께했던 밍기뉴 여행을 떠올렸다. 모두에게 여지없이 찾아올 날을 준비했던 우리의 여행은 짜릿하고 의젓했다. 담담하고 의연하게 올 것임을 알고 기다리는 마음이었다. 그날이 올 때까지 두려움 없이, 후회 없이, 즐겁게 살자며 우리는 산에서 내려와서 도토리묵을 먹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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