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의 그랜드 투어]
헤밍웨이를 헤밍웨이로 만든
눈치보지 않는 낭만과 도발
예술의 파리를 만든 혁명정신
낭만적인 강변, 아름다운 석조 건물과 화려한 쇼핑 거리에 샹송이 흐르는 도시. 많은 사람들이 떠올리는 파리의 이미지다. 헤밍웨이, 피카소, 피츠제럴드, 세잔, 앙리 마티스···. 파리에 영혼의 주소지를 올렸다는 문학가, 예술가들은 꼽기도 힘들 정도로 많다. ‘예술과 낭만의 도시’라는 수식어가 자동으로 따라 다니는 이유다. 세련되고 감각적인 패션 피플과 자부심이 강한 예술가들의 도시. 오랫동안 상상해 왔던 내 마음속의 파리도 그랬다.
이름만으로도 마음이 부풀던 파리에 처음 간 것은 오래전 일인데 그때 거리에 굴러다니던 쓰레기와 오래되고 지저분한 건물 외관을 보면서 기겁을 했던 기억도 있다. 실망스러운 만큼 궁금증은 더 커졌다. ‘도대체 파리의 무엇이 수많은 예술가들을 불러 모으고 영감을 준 것일까. 어떻게 그들을 감당할 수도 없을 정도로 유명해지는 위대한 예술가로 만들었던 것일까.’
1800년대 후반부터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파리는 문화적 포만감과 영감의 원천이었다. 전쟁 후에도 파리가 아닌 곳에서는 살 수 없다며 돌아온 예술가들은 응축되어 있던 에너지로 위대한 작품을 쏟아냈다. 도시 자체가 예술 작품의 주제이자 무대가 된 첫번째 케이스가 파리다.
파리를 걷다 보면 제임스 조이스와 장 폴 사르트르가 담소를 나누었다는 카페, 피카소의 단골 식당, 게르니카를 완성한 작업실, 무명의 헤밍웨이가 신혼을 보내며 작품을 썼던 공원과 카페를 만난다. 아폴리네르와 마리 로랑셍, 에밀 졸라, 로트렉, 마네, 고갱, 르누아르까지 아니 어떻게 그 사람들이 다 여기에 있었던 걸까?
영화감독 우디 알렌도 그것이 궁금하고 신기했던 것 같다. 그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는 우리가 아는 모든 예술가들이 파리에 모여 있었던 시대로 가는 상상에서 만들어졌다. 말 그대로 ‘그들’이 그들이 되기 전, 비로소 그들이 되어가는 파리의 이야기다.
대체 어떤 에너지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을까 했던 의문은 세느 강(La Seine)을 따라 흐르는 파리의 역사를 확인하면서 비로소 풀린다. 에펠탑과 미술관, 자유의 여신상과 백조 섬을 지나고 노트르담 성당을 향하는 유람선에서 나는 파리에서 혁명을 빼고는 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던 것 같다.

에펠탑, 파리의 상징이자 랜드마크인 300m 높이의 거대한 철골 탑은 애초부터 혁명을 말하고 있다. 1789년 인류사의 역사를 완전히 바꾼 프랑스 혁명의 100주년을 기념하며 파리 어디서든 보이도록 설계하고 지었다. 파리의 상징 자체가 혁명인 것이다.
바스티유 감옥을 부수며 시작된 혁명은 왕정과 공화정을 오가며 파리는 오랫동안 많은 피를 흘렸다. 혁명의 출발지 바스티유 광장에는 금빛 ‘자유의 수호신’을 올린 기념탑이 서 있다. 1830년 7월 혁명과 이후 2월 혁명의 희생자 이름을 탑에 새겼고 500명이 넘는 사람들의 유골을 안치한 그야말로 항거의 상징이다.
지금도 파리의 시위는 바스티유에서 시작해서 콩코드 광장으로 향한다. 파리에서 가장 넓은 콩코드 광장은 원래 루이 15세의 기마상이 있었던 곳이다. 혁명으로 왕의 기마상은 철거되고 여기서 루이 16세와 마리 앙트와네트를 참수했다. 단두대를 세우고 1000명이 넘는 사람을 처형했던 혁명의 광장이 화합을 뜻하는 콩코드 광장이다.
콩코드 다리도 바스티유 감옥의 잔해로 세웠으니 구석구석 혁명의 흔적이 없는 곳은 없다. 아름다운 시테섬 역시 시인과 화가에게 영감을 주는 대상이지만 동시에 시테 궁전의 콩시에르주리는 마리 앙뚜아네트가 투옥되어 단두대 처형을 기다렸던 장소이다.
시테섬 동쪽 끝 중세 고딕의 걸작 노트르담 대성당은 1000년동안 파리의 고통과 피의 역사를 함께한 곳이다. 노트르담의 성당 종은 혁명과 전쟁 중에 녹혀져 대포를 만드는 데 쓰이기도 했고 나폴레옹이 대관식을 열어 프랑스 대혁명을 마무리한 곳이기도 하다. 혁명, 혁명, 파리는 혁명 아닌 곳이 없다.

파리의 혁명 정신과 역사는 구시가지에만 머물지 않는다. 첨단 비즈니스를 이끌며 미래로 이어지는 라데팡스 역시 혁명의 연장선에 있었다. 현대식 빌딩숲으로 둘러싸인 드넓은 광장 앞에 세운 그랑드아르슈(Grande Arche)가 그것이다. 프랑스 혁명 200년을 기념하여 인간정신의 승리를 형상화한 개선문은 에투알 광장의 개선문을 마주 보도록 설계되어 서있다.
혁명은 국가와 정치에만 쓰이는 의미는 아니다. 사전적 의미로는 ‘이전의 습관이나 방식을 단번에 깨뜨리고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급격하게 세우는 일’이다. 예술과 다른가? 나만의 방식으로, 아부하거나 눈치보지 않는 자신의 방식으로 삶을 표현하는 예술이 혁명의 도시에서 폭발하고 꽃을 피운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네가 삶의 주인이야. 인생에 한번은 눈치보지 않는 예술가로, 혁명가로 살아라.” 파리가 들려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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