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의 그랜드 투어]
상도문 돌담마을 ‘속초오실’
해 밝은 동네서 ‘워케이션’
강원도의 힘, 속초의 응원
외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고 할머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채질을 해 주셨다. 선잠이 든 채로 하늘까지 자란 느티나무 가지에 걸려있던 하얀 구름을 바라보았다. 그때 매미 울음소리가 들렸던가? 뜨거우면서도 시원한 여름날이었다. 어린 시절 기억 가운데 좋았던 때를 묻는 말에 애쓸 필요도 없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요즘 아이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겠지만 ‘라떼는 말이야’ 세대의 어른들은 어린시절 여름방학을 그렇게 보냈다. 그 시절 서울에서 나고 자라는 도시내기 아이들도 방학이면 학원 대신 시골 외갓집에 며칠씩 갈 수 있었다.
TV도 없고 오락기가 없는 세계에서 아이들은 할아버지가 농기를 정리하는 것을 구경하며 놀았다. 시골 친구들과 개망초 핀 들에서 뛰고 풀 숲에 숨은 곤충을 찾았다. 정자나무 아래 마루에 누워 마을 어른이 잘라주는 수박을 먹고 하늘 구경을 하는 시간이 지루할 새 없이 흘러갔다. 해 질 녘에는 엄마가 보고 싶다며 울었지만, 막상 집으로 돌아갈 날이 되면 하루만 더 있겠다고 떼를 쓰기도 했던 어린 시절의 시골이 가끔은 참을 수 없이 그립다.

며칠이라도 핫플레이스에서 인증사진을 찍고 돌아오는 휴가가 아니라 외갓집에 간 것 같은 여행을 하고 싶었다. 시골 할머니가 삶아주는 포슬포슬 찐 감자 맛을 배우던 여름방학을 다시 보낼 수 있다면 서걱서걱하는 마음이 좀 살아날 것 같았다. 시골은 아이들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다 자란 어른도 시골의 응원이 절실할 때가 있다.
“설악산이 이쨔나아. 파도는 뭐니 뭐니 해도 동해쟈나아.” 친구가 코미디언이 유행시켰던 강원도 말투를 흉내 내는 바람에 깔깔 웃다가 속초로 정해버렸다.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2시간 조금 넘게 달리니 으르렁거리는 시원한 속초 바다를 볼 수 있었다. 조도를 바라보며 바닷바람을 맞으며 걷다가 ‘속초오실’ 여행지 도문동으로 향했다. '속초오실'은 '속초로 오세요' 라는 뜻이라고 했다.

설악산 자락에 있는 속초 상도문 돌담마을은 500년 전통을 간직한 한옥마을이다. 밥집, 카페, 상가로 이루어진 지역에 외관만 한옥으로 건물을 지어 놓고 마을이라고 부르는 관광상품 동네가 아니라 400명이 넘는 원주민들이 수백 년 시간을 이어 사는 진짜 마을이었다.
마을에 흔한 돌을 모아 담을 올려 돌담마을이라고 부르게 된 마을. 어깨를 살짝 넘는 담장은 있지만 대문 있는 집은 거의 없는 오래된 시골 마을이었다. 흔하게 보았던 나팔꽃, 접시꽃, 호박 덩굴이 돌담을 덮고 그 마을에 살고 있는 터줏대감 고양이, 참새, 개구리, 부엉이, 달팽이, 거북이까지 마을의 캐릭터 작품이 되어 돌담에 올라가 방문객을 맞는다.
긴 세월, 마음을 다해 지켜낸 마을 모습은 이렇구나 싶다. 200가구 마을의 구석구석을 모두 걸어도 2시간이면 마을 길을 모두 그릴 수 있을 정도로 크지 않은 시골이다. 마을에는 금강송이 이어진 송림 산책로, 송림 속에 속초 8경 중 하나라는 학무정이 있지만 여기서 지내는 2박 3일의 의미는 풍광이나 경치보다는 실제로 살아보는 것에 있다.
오랜 이야기를 지닌 민박집에서 머물고, 할머니 옛날얘기를 듣던 것처럼 마을 이야기꾼 할아버지와 함께 마을을 돌면서 역사와 문화 이야기를 듣는다. 체험형 프로그램으로 머무는 사람을 위해서는 마을의 짚공예 장인과 함께 짚으로 달걀꾸러미를 만드는 시간도 마련되어 있다.
상도문 돌담마을 여행 중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은 아침에 마을 주민이 만든 아침상 서비스를 받는 것이었다. 지역에서 나는 감자와 토마토로 직접 만든 수프와 야채죽과 과일, 물김치로 차린 아침 밥상을 받는 서비스라니 호텔 조식에 비할 바인가? 식사 서비스는 마을 사랑방 역할을 하는 문화공간에서 함께하는 형태로 바뀔 계획이라지만 그것도 좋을 것 같다. 어쨌든 마을 어머니들이 만들어 주는 집밥, 마을밥 아닌가.

‘속초로 오세요’ 라는 2박 3일 속초오실이 끝나고 나니 아예 한달쯤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럽 배낭여행을 계기로 서울내기 남매 둘이서 속초의 동명동에 소호거리를 만들었다기에 찾아보았다.
지역을 존중하며 로컬을 살리고 외지인이 들어와 새롭게 연대하며 소통하는 꿈이었다고 한다. 오래된 마을에 자유롭고 새로운 꿈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일도 하고 여행도 하면서 한 달쯤 지낼 곳을 우리나라에도 만들 수 없을까? 하고 시작한 일이라고 했다.
지금 소호거리가 된 속초의 수복로 259번길은 시외버스 터미널 뒷골목, 오래된 유휴 시설이 가득해 어두웠던 골목이다. 지난 6년 동안 일과 생활, 여행을 함께하고 싶다는 열망을 가진 청년들에 의해 살아보고 싶은 소호거리로 바뀌고 재기발랄한 모의가 일어나며 발전하는 중이다.
낡고 소외된 여인숙은 게스트하우스 건물로 바뀌었고, 고구마쌀집은 여행자를 위한 사랑방이자 컨시어지 센터, 고구마쌀롱이 되었다. 칙칙하고 어둡던 거리에 카페와 스튜디오가 들어서고 새롭지만 이질적이지 않은 벽화골목에 서서 앞으로 생겨날 것들을 상상하며 기분이 좋아졌다.
새로운 계기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 칙칙한 일상을 리셋하고 싶지만 완전히 단절할 수는 없는 사정이라면 해가 밝아오는 속초의 동명동에서 지내보는 한 달은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삶을 바꾸는 그랜드 투어가 유럽으로 가야만 되는 것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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