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의 그랜드 투어]
'더 글로리' 동은이 바둑 두던 중앙공원
꿈 속에 그리던 고향, 상당산성 마을
드라마 덕후들 다 모여라, 수암골

“청주 가면 뭐해요? 밋밋하고 노잼인데.” 

청주에 간다고 했을 때 대략 그런 반응이었다. 볼 것이 없을 거라고 했고 특별히 할 것이 없다고도 했다. 별다른 기대 없이 크게 하품하듯 찾았던 청주에 이제 미안하다. 아니 대체 왜들 그러셨대? 볼수록 매력이던 청주를 두고.

맑을 청자를 써서 맑은 고장, 청주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 대략 1100년 전 서기 940년의 일이니 굳이 말하자면 청주는 고려의 도시다. 천년 도시답게 도시 곳곳에 진한 역사의 이야기가 무심한 듯 배어있는가 하면 때로는 생생히 요동치며 흐른다. 

청주 읍성을 남북 방향으로 연결한 큰길, 성안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청주 중심에 있어 중앙공원이라고 부르는 곳에는 문화재, 비석이 많아 비림공원이라고 한다. 공원에 들어서는데 거대한 나무가 자석처럼 사람을 끌어당겼다. 청주목 객사문 앞에 있던 나무들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 나무는 자그마치 수령 900년이 넘는다.

고려시대 목은 이색과 그 시대 충신들의 목숨을 구한 일화가 있는 은행나무, 900년동안 같은 자리에서 세상을 내려다본 나무에 그 시간이 부여한 영이라도 깃든 것일까?  30m가 넘는 키에 둘레도 8m에 달하는 나무 앞에 서니 5월 햇살에 반짝이는 나뭇잎도 예사롭지 않다.

이 거대한 나무는 넷플릭스의 ‘더 글로리’에 등장했다. 드라마의 주인공 문동은이 인생을 건 복수를 위해 선배로부터 바둑을 배운 곳이다. 천년의 기운을 품은 은행나무 아래에서 바둑이라니, 드라마라고 해도 참 적합한 설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청주중앙공원, '더 글로리' 극 중에 문동은이 주여정으로부터 바둑을 배우는 곳 /사진=넷플릭스 제공
청주중앙공원, '더 글로리' 극 중에 문동은이 주여정으로부터 바둑을 배우는 곳 /사진=넷플릭스 제공

청주 읍성의 성벽은 사라졌지만 길이 되어 남은 흔적을 따라 걸어보면 성안길은 몇 걸음마다 나타나는 문화유적을 만나는 시간여행이 된다. 

고려시대 최고의 누각 망선루,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 청주성 수복을 기념하여 세운 비석이 있고 개화기 흥선대원군이 서양 세력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려 세운 척화비, 충청 병원문 등 호들갑 하나 없이 문화재가 즐비한 길이다.

공원을 나와 평범해 보이는 번화가인가 했는데 성안길 중심에 13m가 넘는 철로 된 구조물이 나타났다. 고려는 불교의 나라였다. 절에 행사가 있을 때 깃발(당)을 매달던 철제 당간으로 고려 광종 13년, 962년에 건립되었다고 새겨진 국보 제41호의 철 당간이다.

청주중앙공원에는 바둑을 두고 담소를 나누는 어르신들만큼이나 푸르름이 터지는 십대 청소년도 많다. 청주 명물 호떡, 얼굴을 모두 가리는 커다란 호떡을 하나씩 입에 문 아이들은 문동은이 주여정에게서 바둑을 배웠던 900살 압각수 주변을 돌아본다. 청주 성안길의 중앙공원은 묘하게 바둑을 닮았다. 고요하게,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침묵 속에서 상대를 제압한다. 

늘 시골 고향이 있는 사람이 부러웠다. 명절에 고향을 오가는 데 몇 시간이 걸렸느니, 시골은 이러쿵저러쿵해서 불편하다든가 하는 말에 오히려 질투심이 솟았다. 내가 상상하는 고향에는 큰 나무가 있다. 평평하고 양지바른 땅을 지나 너무 크지 않아 끝이 보이는 호수도 하나 있고 부루퉁한 기분일 때 걸을 수 있는 성곽길이 마을 뒤로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거짓말처럼 꿈꾸던 고향과 꼭 같은 마을을 만난 곳이 청주다. 상당산 계곡을 둘러 돌로 쌓아 만든 산성, 백제 때부터 있던 토성에 김유신의 셋째 아들이 돌로 쌓아 지었다는 기록이 있는 상당산성 마을은 바로 내 꿈속 고향 그대로다. 

청주 상당산성. 백제시대 토성을 김유신의 셋째 아들이 석성으로 만든 이후 조선시대까지 증개축된 4km 둘레의 산성이다. /사진=박재희
청주 상당산성. 백제시대 토성을 김유신의 셋째 아들이 석성으로 만든 이후 조선시대까지 증개축된 4km 둘레의 산성이다. /사진=박재희

상당산성이 멀리서도 상당산에 두른 띠처럼 또렷하게 보였다. 남문 앞 넓게 펼쳐진 들판을 뒤로 상당산 능선 따라 이어진 성벽은 둘레가 4km가 넘는다. 성곽을 따라 한 바퀴 돌고 내려오면 성안 마을이다. 꿈처럼 큰 나무 아래 원두막이 있고, 마을 한 가운데 저수지가, 나무다리로 이어지는 논이 펼쳐져 있다. 죽방을 걸으며 들여다보니 개구리가 될 올챙이들이 통통하고 바쁘게 떼 지어 다니고 있었다.

백구를 데리고 산책하는 청년, 50여 가구가 살고 있는 성안 마을 주민이 운영하는 전통 식당에서 막걸리에 청국장찌개, 두부요리, 묵에 빈대떡까지 묵직하게 휘는 한 상을 받으며 생각한다. 상당마을, 백제 때 청주목을 상당현이라 불러서 유래된 이름이라니 어쩌면 나는 백제 사람이었을까? 

달을 처음 만나는 동네라 달동네라 한다지. 넓고 바른 땅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저마다 비탈을 지나 거친 언덕을 올라가 달을 만났을 것이다. 달을 만나는 동네, 달동네 중에 청주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마을, 수암골을 찾았다. 마지막 달동네 수암골의 낮은 담벼락에는 지역 주민과 작가들이 그려 넣은 벽화가 가득하다.

15년 전부터 전국적으로 공공예술 프로젝트로 벽화마을이 많이 생겨났다. 서울 이화마을은 관광객이 너무 몰려 주민의 불편 호소로 모두 지우기까지 할 정도로 옛 골목길, 정겨운 추억을 돌이킬 수 있는 마을 벽화는 분명 볼거리 중 하나다. 

청주의 마지막 달동네라는 수암골 벽화마을 /사진=박재희
청주의 마지막 달동네라는 수암골 벽화마을 /사진=박재희

수암골로 가는 길은 드라마 덕후들에게 최고의 산책길이기도 하다. 드라마 거리 초입, 대한민국 드라마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고 평가되는 청주 출신 김수현 작가의 이름을 건 아트홀을 시작으로 <카인과 아벨> <부탁해요 캡틴> <영광의 재인> 등 드라마를 추억할 수 있는 촬영지, 드라마 광장을 지난다. <제빵왕 김탁구> 드라마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반가울 팔봉제빵점은 여전히 고소하게 빵을 굽는다.

제과점을 마주한 골목을 오르면 수암골 마을 벽화가 나타난다. 비밀의 화원, 풍물패, 옛날이야기 해님 달님, 익살스럽고 유쾌하며 밝은 울보들을 만나면서 골목 골목을 샅샅이 걸으며 추억을 밟는 시간이 행복해졌다.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 수암골 전망대에 올라 야경을 보며 마을 여행을 마무리하면 된다. 

청주, 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어냐는 물음에 더 이상 더듬거릴 필요가 없으니 어느덧 청주에 정이 들었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청주 여기, 오늘부터 우리 1일이다. 무심하게 걷다가 고요하고 묵직한 청주에 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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