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의 좌충우돌 연기도전기]
배역 연습을 거듭해 갈수록
좋은 스승 중요성 실감하게 돼
처음엔 맞지 않은 옷이었지만
점점 자기 몸에 맞도록 되어가

(지난회에서 이어짐)

「산국」연습 과정은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감탄하게 했다. 리딩 목소리를 듣고 배역을 정한 지도 선생님의 안목에 감탄했다. 사람마다 목소리가 가진 특성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더 나아가 저 목소리가 어떤 변화 과정을 통해서 그 배역에 맞추어 나갈지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맡고자 한 농부의 아낙역을 맡은 미선이(가명)는 완전히 그 역에 몰입되어 한 장면 한 장면을 정말 실감나게 표현했다. 양반집 마님인 나에게 울분을 토하는 장면이 있는데 어찌나 야멸차게 욕을 퍼붓는지 한 대 갈기고 싶었다. 대사를 읽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로 울분의 연기를 하고 있었다.

시대가 바뀌어 신분제도가 철폐되었으니 양반 쌍놈 따질 필요가 없었고 양반에게 굽실거릴 필요가 없어진 그런 시대적인 상황을 업고 “니가 언제부터 내 상전이여, 다 같은 사람이여 이년아”라며 물거품을 무는 장면에서 양반 마님인 나는 '감히 뉘 앞에서 주둥아리를 함부로 나불거리냐'(대본에 없는 내용)라고 되받아치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들 정도로 미선이의 독기 서린 목소리 연기는 멋졌다.

여자를 독기 서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상대방을 제압하는 이 남자. 미선이는 이 남자처럼 마님을 향해 거친 말을 망설임 없이 쏟아냈다. /픽사베이
여자를 독기 서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상대방을 제압하는 이 남자. 미선이는 이 남자처럼 마님을 향해 거친 말을 망설임 없이 쏟아냈다. /픽사베이

왜놈들에게 겁탈당한 역을 맡은 효순이(가명) 연기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울 정도로 감동이었다. 효순이의 목소리 연기는 물을 빨아들이는 휴지 같았다. 지도 선생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흡수하는 효순이를 보면서 훌륭한 스승을 만나면 어떻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지 그 변화 과정을 알 수 있었다.

정신을 놓아버린 효순이가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향해 "왜놈들이 덤벼들자마자 깜빡 정신을 잃었지유. 눈을 떠 보니까 하늘에 구름이 보이데유"를 읊어대는 모습에선 감당할 수 없는 그녀의 슬픔과 절망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휘몰아치는 세찬 바람에  떠밀려 흘러가는 구름처럼 구둣발 아래 짓밟힌 그 참담한 상황이 그녀의 모습과 입에서 그대로 전달되었다.

넋을 놓아버린 그 목소리, 정신이 피폐해진 그 목소리 연기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몸에 소름이 돋게 했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너무나 리얼하게 연기를 잘해서 나도 모르게 몸이 반응을 보였다.  프로배우 못지 않은 그녀의 목소리와 표정은 관객들을 확 빨려 들게 만들었다. 동료로서 또 관객으로서 그녀의 연기를 마구마구 칭찬해주고 싶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공허한 표정, 자신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눈물은 왜놈에게 짓밟힌 효선이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 사진의 여인처럼 /픽사베이
헝클어진 머리카락, 공허한 표정, 자신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눈물은 왜놈에게 짓밟힌 효선이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 사진의 여인처럼 /픽사베이

효순이와 우리는 처음엔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배우들이었지만 점점 그 옷이 자기 몸에 맞도록 만들어가고 있었다. “맞아, 바로 저 목소리야. 저 목소리”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노력은 좋은 결과를 만들었다.

공연을 앞두고 우리는 리플렛에 들어갈 사진을 찍었다. 예쁘게 보이기 위해 미용실에 가서 머리도 손질하고 얼굴의 잡티가 보이지 않게 화장도 했다. 넓은 얼굴을 감추어보려고 양손으로 턱을 가리기도 하고 한 손으로 꽃을 받친다는 느낌으로 살짝 고개를 돌리기도 했다. 사진사의 요구로 고개를 5도가량 숙이고 턱을 당기며 살짝 웃기도 했다. 사진사의 요구를 듣고 포즈를 취하면 동료들이 웃고 그 소리에 덩달아 웃으면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셔터를 눌렀다. 단 한 장의 사진을 위해 수십 번 셔터를 눌렀다.

연기를 배우는 과정도 재미있지만 이처럼 연극이 무대에 올라가기 위해 거치는 과정도 재미있었다. 리플렛에 나온 사진을 보니 실물보다 훨씬 젊고 턱도 갸름하고 자연스럽게 살짝 웃는 모습도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의상도 준비했다. 모두 동일하게 검은색 바지(또는 치마)와 검은 티를 입고 문화재단에서 준비해 준 겉옷을 입었다. 나는 양반집 마님 역할이었기에 화려한 자수가 놓인 짙은 남색 치마를 준비했다.

드디어 막이 오르는 날.

‘나는 잘 할 수 있다’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약간 흥분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천천히 걷고 천천히 말했다. 공연장에 도착하니 벌써 지도 선생님과 조명 담당자들이 무대 위를 점검하고 있었다. 연극 아카데미 담당자도 바쁘게 움직이고 잇었다.

공연장 밖에는 연극 포스터가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연습 과정을 찍은 사진들도 붙어 있었다. 그 사진들 속에서 내 모습을 일일이 찾아 예쁜지 살펴보면서 평정심을 유지했다. 동료들이 하나둘 도착하고 핀마이크를 입 옆에 부착했다. 난생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공연 준비를 마친 나와 동료들은 대기실로 모였다. 잠시 후의 무대를 머릿속으로 그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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