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의 좌충우돌 연기 도전기]
영화 촬영 후 편집 영상 보고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내 얼굴에서 배우 김정희가 아닌
대나무 위의 판다가 생각났다

2021년 10월 17일, 영화 촬영에 필요한 소품과 의상을 챙겨 촬영 장소로 향했다. 소품도 의상 준비도 모두 배우의 몫이었다. 배우라니? 내가 나 스스로 배우라고 인정한 것이 아니라 연출가 선생님께서 “배우”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나를 지목한 말이 아니라 옆자리 선배를 가리키는 말인 줄 알았다.
힐끗 옆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그 선배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입을 내밀었다.
OH! MY GOD.
세상에 나를 “배우”라고 불러주다니.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머릿속에서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밴에서 하이힐을 나란히 내밀며 내리는 내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플래시가 터지고 여러 대의 마이크가 내 입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플래시 불빛으로 눈이 부셨다.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옆구리를 찌르는 손에 의해 눈을 떴다. 그리고 초라한 조연 역할로 돌아왔다.
그러나, 지난 회(回)에 언급한 것처럼, 조연이면 어떠리, 영화만 재미있게 찍으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나를 연출가 선생님이 배우라고 인정하는데 나는 배우가 되었는데 더 이상 무엇을 바라리! 내 꿈이 성취되었는데 말이다.
연출가의 그 “배우”라는 말에 정신을 놓아버린 나는 필요한 소품이 나열될 때마다 “제가 준비하겠습니다”를 노래의 후렴처럼 읊어댔다. 반백 년 세월이 지나 회갑이 가까워져 오는 이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 감당 안 되는 주책을 어찌하리.
각설하고,
나는 일찌감치 촬영 장소에 도착했다.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커피부터 한 잔 마셨다. 뜨거운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온몸으로 퍼지자 평정심이 찾아왔다. 옷을 갈아입고 연출가 선생님을 기다렸다. 동료 배우들과 함께 대사를 맞추고 잘해보자고 화이팅을 외쳤다.
얼마나 지났을까? 연출가 선생님이 전문 촬영 기사와 함께 오셨다. 촬영 장소를 세팅하고 소품을 배치하고 얼굴을 매만졌다. 그 분주한 틈 사이로 현장감이 확 덮쳐왔다. 유명한 영화배우가 되어 촬영하는 것처럼 마음이 설레었다.
액션 소리와 함께 카메라가 돌아가고 몸이 움직이고 입술이 움직였다. NG가 났다. 드라마 끝나고 탤런트 이름이 올라갈 때 웃기는 NG 장면을 보면서 재미있다고 크크 웃었는데 웃을 일이 아니었다. NG는 죄송하다고 머리 숙여야 하는 일이었다. 몸이 얼어붙고 표정이 굳어졌다.
다시 NG가 나고 다시 “액션” 소리와 함께 카메라가 돌아갔다. 배우 김정희가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이 “컷”소리와 함께 끝났다.

나는 주인공 친구의 역할을 맡아 열심히 연기했다. 눈웃음도 치고 상대방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바로 대사도 치고 짜증 나는 말투로 책을 던지기도 했다.
동료 배우는 피아노 앞에서 피아니스트처럼 손가락 4개를 나란히 뒤집어 피아노 건반을 한꺼번에 좌르르 훑었다. 그리고 큰소리가 나게 피아노를 ‘쿵’ 누르면서 머리를 박고 괴로운 상황을 연기했다.
남편 잘 만나 부잣집 사모님 역할을 맡은 선배는 우아한 옷을 입고 알이 굵은 반지를 끼고서 한껏 거드름을 피웠다. 영화를 찍는 그 순간만큼은 우리는 모두 일류 배우였다. 순간의 긴장과 짜릿함으로 온몸이 전율했다.
짧은 영화 한 편 찍는데, 하루가 걸렸다. 촬영이 끝나자 우리는 모두 하이 파이브를 하면서 서로 격려의 인사를 건넸다. 연출가 선생님께도 촬영 기사님께도 정중히 허리 굽혀 인사했다.
대단한 일을 한 위대한 인물로 영화사에 길이 남을 배우 같았다. 저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손가락 두 개를 접어 귀 밑머리를 슬쩍 걷어 올리면서 고개를 위로 치켜올렸다. CF 속 유명 영화배우처럼.
며칠이 지났다. 그 며칠이 여삼추 같았다. 연출가 선생님께서 편집한 영상을 보내왔다. 나는 울고 싶었다. 영화 찍던 그날 아침, 선배가 그려준 아이라인이 시커멓게 범벅이 되어 있었다.
눈을 살짝 감았다가 위로 치켜드는 장면에서 그리고 살짝살짝 눈웃음치면서 한껏 멋을 부렸던 장면들이 온데간데없고 눈탱이가 검은 숯덩이가 된 어떤 여인이 화면에 앉아 있었다.
검은색 아이라인이 번져서 눈 주위가 시커멓게 된 여인, 그 여인은 영화배우 김정희가 아닌 대나무 위에 앉아 있는 검은 눈탱이의 판다였다.
눈웃음치는 장면에서도 이쁜 눈웃음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시커멓게 범벅된 아이라인만 보였다. 그것도 왼쪽 오른쪽이 짝짝이가 된, 봐 줄래야 봐줄 수 없는 가관의 모습. 대사 치는 입 모양도 나의 연기 장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시커먼 눈을 한 판다 한 마리만 머릿속에서 왔다 갔다 했다.

짜증이 왈칵 올라왔다. 영상을 심술부리듯 확 꺼버렸다. 촬영 기사와 편집자를 한꺼번에 싸잡아 마구마구 불평을 쏟아냈다.
지인들에게 영상 나오면 보여 주겠다면서 여우조연상 받은 배우가 된 것처럼 설레발을 쳤는데 그 누구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 영상은 나만 보고 지워버렸다.
우리들의 잔치로만 기억하고 싶었던 그 영화 『언니 잘 먹었어』는 나에겐 시커먼 눈두덩이만 생각게 하는 영화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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