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의 좌충우돌 연기도전기]
폼 잡고 허세 부리는 왕초 닭 맡아 몰입
평소 내 성격과 반대인 역할 하다 보니
속이 뻥 뚫리고 스트레스가 확 풀렸다

(지난회 새(鳥) 공연에서 이어짐)

‘새(鳥)’ 대본에 나오는 대사와 행동을 나름대로 익혀 공연할 준비를 갖추었다. 이번에 공연하는 ‘새’는 무대 위에서 대사와 동작을 같이하는 그야말로 연극이다. 생방송이다. 실수하면 똥 밟은 것 같이 찜찜하고 그 냄새가 종일 따라붙어서 어디론가 숨고 싶을 것 같았다. 마음 부담이 컸다.

지난번에 찍은 영화는 심적인 부담이 크지 않았다. 무엇보다 관객 앞에서 연기하는 것이 아니고 연출자와 카메라 감독 앞에서 연기하는 것이었다.

영화감독의 액션 소리와 함께 카메라가 돌아간다. 감독의 요청이나 배우의 실수로 다시 한 번 촬영이 가능하니 생방송과 다름 없는 연극보다 긴장감이 덜하다. /픽사베이
영화감독의 액션 소리와 함께 카메라가 돌아간다. 감독의 요청이나 배우의 실수로 다시 한 번 촬영이 가능하니 생방송과 다름 없는 연극보다 긴장감이 덜하다. /픽사베이

잘못하거나 실수하면 죄송스럽긴 하지만 다시 “액션” 소리와 함께 한 번 더 촬영하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동료 배우가 실수해도 마찬가지였다. 혼자만 실수할 때는 머리를 구멍에 콕 박은 새처럼 얼굴을 들 수 없었지만, 동료가 실수를 하면 적잖이 위로가 되었음도 솔직히 고백한다.

어찌 되었든 결론은 연극보다 영화 촬영은 마음 부담이 크지 않았다. 또 낭독극도 마음 부담이 크지는 않았다. 대사를 잊어버릴 걱정과 동작에 대한 염려는 없었다.

그런데 이번 공연은 대사도 외워야 하고 그 대사에 맞게 동작도 해야 하니 긴장이 되었다. 또한 비중 있는 왕초 닭(닭들의 리더 역할) 역이기에 책임감도 컸다. 나름 분석한 닭들의 리더 왕초는 겁도 많고 귀도 얇고 그러면서도 왕초 노릇을 해야 하기에 폼도 잡아야 하고 허세도 부려야 하는 한 마디로 웃음 나오는 주책없는 역이었다.

난 그 역할이 너무 재미있어 다른 역할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여태 살면서 어디 가서 큰소리 한번 못 지르고 내 생각도 당당하게 말하지 못했다. 그저 공손하게 “예, 예, 분부대로 합지요” 라며 복종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무대에서만큼은 큰소리치고 잘난 척하는 왕초 역할을 신나게 해보고 싶었다.

극본에는 졸개들을 야단치거나 여유 부리며 잘난 척하는 왕초의 대사가 많았기에 왕초 역할이 맘에 쏙 들었다. 신나는 연기로 스트레스까지 확 풀릴 것 같았다. 이 참에 공식적으로 지랄을 떨어도 누구에게도 혼나지 않고 오히려 칭찬받을 수 있으니 이 기회를 어찌 놓칠 수 있겠는가?

첫 대사부터 체한 속이 확 뚫리는 기가 찬 대사다.

“아니 이것들이 워째 지랄이여, 지랄이. 잠 좀 잘라니께”라는 이 대사로 첫 입을 뗀다. 어때 감(感)이 확 오지 않는가? 감히 지랄이라는 말을 첫 등장부터 시원하게 내뱉을 수 있다니! 대사가 저절로 외워진다. 그리고 그 대사에 졸개들이 쫄아서 쩔쩔매는 모습을 보이니 이 아니 시원한가? 한여름에 부는 강풍보다 더 시원하고 꽁꽁 언 아이스크림을 깨물어 먹는 것보다 더 상큼하지 않은가?

나는 이 연극에서 누구 하나 내 앞에서 잘난 척하지 못하는 폼나는 왕초 닭 역할을 맡고 있다. 의상도 최고의 자리에 있는 사람만이 입을 수 있는 누런 황금색의 옷을 입고 있다. 사극에서 황제가 입는 누런색 옷, 바로 그 색이다. 깃털을 단 누런색 옷에 붉은 닭 벼슬 모자를 쓰고 한바탕 멋진 판을 벌이고 싶었다.

왕초 역에 어울리는 깃털 달린 황금색 옷, 닭 벼슬 모자, 잘 어울리지 않는가? /사진=김정희
왕초 역에 어울리는 깃털 달린 황금색 옷, 닭 벼슬 모자, 잘 어울리지 않는가? /사진=김정희

인생은 한바탕의 연극이라고 했으니 진짜 연극판에서 “얼씨구씨구 들어간다. 절씨구씨구 들어간다”라는 느낌으로 미친 척 놀고 싶었다. 언젠가 본 각설이 타령의 각설이는 누더기를 걸치고도 멋들어지게 잘만 놀았다.

“얼씨구씨구 들어간다. 절씨구씨구 들어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소.”

각설이는 이런 타령을 늘어놓으면서 신나게 무대를 누비고 있었다. 나는 왕초 닭으로 변신하여 누구 눈치보지 않는 보스로 무대를 활보하고 싶었다.

“얼씨구씨구 들어간다. 절씨구씨구 들어간다.

누런색의 황금 왕초 오늘도 당당히 행차한다.

졸개들아 비켜라, 이 왕초 가는 길 막는 자는 오늘이 황천길이다.

얼씨구씨구 들어간다. 절씨구씨구 들어간다.”

나는 꽹과리 치고 북 치며 완전히 몰입하고 싶었다. 누런 황금색 옷을 입은 이 왕초에게 감히 덤비는 자 목숨을 잃을 지어다.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덤벼라!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왕초 닭의 대사를 입에서 토해냈다.

“그런디 저 놈 머리가 약간 희떡거린다는 야그는 들었지만 말이야." - 여유 있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사 치기

”거 참 별일이네 그려, 이 닭 자슥아, 야야야 이 닭 개자슥아, 너 어디서 굴러 먹던 닭뼈다구여!"- 위협하듯이 대사 치기

“이런 썩을 놈이. 야, 이놈아 치킨집도 아니고 통닭집은 그 머시냐 나같이 알도 못 낳는 폐닭이나~" – 쉬지 않고 한번에 죽~ 대사 치기

난 무대 위의 나를 머릿속에 그리면서 혼자서 리허설을 하곤 했다.

(다음회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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