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의 좌충우돌 연기 도전기]
야심차게 시작한 첫 무대
조연 중의 조연 역을 맡아
다섯 줄의 대사가 전부였다

연극 교실에 참여한 첫날,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해서 찌그러진 깡통 같았다. 그러나, 난 찌그러진 깡통으로 인생 2막을 끝내고 싶지 않았다. 보라는 듯이 공장에서 막 나온 흠 없는 깡통이 되리라 다짐했다. /사진=김정희
연극 교실에 참여한 첫날,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해서 찌그러진 깡통 같았다. 그러나, 난 찌그러진 깡통으로 인생 2막을 끝내고 싶지 않았다. 보라는 듯이 공장에서 막 나온 흠 없는 깡통이 되리라 다짐했다. /사진=김정희

연극 교실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첫날, 50플러스로 향하는 경사 급한 언덕을 오르며 나는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시작이 반’이라고 나는 이미 연기자가 되어 있었다.

지도 선생님께서 연극 교실 참가자에게 자신의 화양연화를 소개해보라고 하셨다. 인생사는 요지경 속이라고 했던가! 나름 나도 잘난 인생이라고 자부했는데···. 뛰는 놈 위에 나는 놈들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영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하는 사람(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 현직 대학교수, 전 대학교수, 전 공무원, 시니어 모델, 그리고 벌써 연극 교실에 3회차 참석한 사람까지 있었다.

나는 한쪽이 찌그러진 초라한 깡통 같았다. 그렇지만 이내 ‘찌그러진 깡통도 잘 활용하면 새 깡통이 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어차피 인생 1막은 끝났고 인생 2막 시작이니, 찌그러진 깡통으로 출발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난 공장에서 막 나온 흠 없는 새 깡통이 될 자신이 있었다.

연기에 필요한 강의가 짧게 끝나고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극본이 투입되었다. 『기억』이라는 극본이었다. ‘기억’은 대학시절 연극을 함께 한 친구들이 세월이 흐른 후, 다시 뭉친다. 현재와 대학 시절의 기억이 교차하면서 갈등이 고조되고 결국 상대방을 이해하면서 공연을 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조를 나누어 배역을 돌아가면서 읽었다. 연기가 뭔지 대사를 어떻게 쳐야 하는지 정신 차릴 틈도 없이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것 같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배역을 정하는 날이었다. 앞쪽에 심사위원 2명이 자리 잡고 우리는 원 모양으로 둘러앉았다. 진행자가 “A 역할 해보실 분?”이라고 말하자 여기저기서 손을 들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용기가 대단하고 욕심이 많다는 것을 그때 다시 한번 체험했다. 그 짧은 기간에 대사를 외운 사람도 있었다. 누가 무슨 역할을 맡을지도 모르는데 대사를 외우다니.

그뿐인가? “B 역할 해보실 분?” “C 역할 해보실 분?” “D 역할 해보실 분?”이라고 할 때마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손을 드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인생 1막을 헛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세상은 치열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 역할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저렇게 기를 쓰고 하겠다고 야단인가!

“대표 역할 해보실 분?”이란 말을 듣고 나는 그때야 손을 들었다. 나는 ‘기억’에서 단 하나의 역할만 해보고 싶었다. 그 역할이 바로 제작사 대표 역할이었다. 대사가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꽤 비중 있는 역할이었다. 그래서, 그 한 역할만 집중하여 읽고 또 읽으면서 연습했다. 그런데, 그 역할 희망자가 4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제작사 대표 역할을 맡게 되었느냐고?

'NO!'

경상도 사투리를 너무나 멋들어지게 읊은 여인이 그 역할을 낚아챘다. 정작 경상도 출신인 나는 뱃속에서부터 들었던 원조 경상도 사투리를 읊을 생각조차 못 했다. 창의력 발휘가 필요한 이 기막힌 기회를 그냥 흘려버렸다.

그래서 어떤 역할을 맡았느냐고? 조연 중의 조연. 하루하루 살아가기 급급한 아줌마 ‘슬기’ 역할이었다. 딱 두 번 등장에 대사는 다섯 줄이 전부였다. 이름만 이쁜 '슬기' 역이었다. 작은 위로는 두 팀으로 나누어 공연(한 사람이 한 팀에만 참여)되는데 나는 두 팀 다 참여한다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위로였다. 그 역할도 우여곡절 끝에 맡게 되었다. 한마디로 존재감 미약이었다.

생각 같아선 도망가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 막 인생 2막을 시작했는데 출발점에서 그만둘 수는 없었다. 찌그러진 깡통으로 끝낼 수 없었다.  배역인 '슬기' 대사 중에 나의 마음을 너무나 잘 대변해주는 대사가 있었다.  “대희 언니~ 난 대사도 없는데 나~핀 조명 쏴 주면 안 돼? 식구들 다 불렀는데. 날 찾지도 못할 거 같아. 어떡해.” 내 생각을 그대로 옮긴듯한 이 기막힌 대사 “어떡해”를 어떻게 요리할지 여러 가지로 연구했다. 고개를 위로 쳐들고 망연자실하게 말해야 할까? 아니면 털썩 주저앉으면서 바닥을 치고 고개를 푹 숙이면서 말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관중을 향해서 약간 멍해진 얼굴로 들릴락 말락 작은 소리로 말해야 할까? 애드립을 넣어야 할까?  등등 날마다 액션을 바꾸어 보며 고민했다.

또 하나 “에휴”라는 대사는 어떻게 요리해야 제맛이 날까로 고민했다. 한숨을 푹 쉬면서 말할까? 세상 풍파에 지쳐 모든 것을 달관한 듯이 말할까? 빨리 말할까? 힘없이 말할까? 머리를 살짝 치면서 말할까? 고개를 옆으로 돌려 바닥을 내려다보면서 중얼거릴까 등등 혼자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주인공 역할을 맡았으면 무대에 오르기 전에 이미 실신했을 것 같다면서 혼자서 씁쓸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연극이나 영화에서 엑스트라로 출연하는 분. 대사 없이 지나가는 나그네1처럼 얼굴도 제대로 비치지 않는 분. 그 분들도 그 장면 하나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많이 고민했을 것이다. 나도 이번 연극에서 조연 중의 조연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단 다섯 줄의 대사를 어떻게 표현할 지 많은 생각을 했다. /pixabay
연극이나 영화에서 엑스트라로 출연하는 분. 대사 없이 지나가는 나그네1처럼 얼굴도 제대로 비치지 않는 분. 그 분들도 그 장면 하나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많이 고민했을 것이다. 나도 이번 연극에서 조연 중의 조연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단 다섯 줄의 대사를 어떻게 표현할지 많은 생각을 했다. /pixabay

드디어 공연 날. 50플러스 내의 작은 무대에서 막이 올랐다. 사람들은 한껏 좋은 옷을 입고 멋을 부리고 왔다. 난 생활에 찌든 아줌마 역할이라 시장에서 산 저렴한 원피스를 입고 등장했다. 그리고 오버 액션을 했다. 무대에서 사정없이 털썩 엎어져 울음 섞인 목소리로 “어떡해, 어떡해~” 라며 중얼거렸다. 애드립도 넣었다. 관중이라고 해야 50플러스에 근무하는 몇 분과 그곳 프로그램 참석차 오셨다가 우연히 보신 분이 전부였다.

공연이 끝나고 “슬기 역 잘했어요. 재미있었어요”라며 나에게 미소를 건네는 분이 있었다. 그러나 난 여전히 찌그러진 깡통 같았다. 누가 발로 차면 소리만 요란한 찌그러진 빈 깡통, 공장에서 막 나온 폼나는 깡통은 그림 속에만 존재했다. 빈 깡통 스스로 이렇게  자신을 위로할 뿐이었다.

 '조연 중의 조연 역할이었지만 난 최선을 다했다. '라고.

나의 첫 무대는 단 다섯 줄의 대사로 끝나버린 ‘슬기’로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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