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해미백일장 해미 용기상 박분이 님 수상작

2005년에는 야간에 여성인력 개발센터에서 공부하고 케어 복지사 자격증을 받았다. /박분이
2005년에는 야간에 여성인력 개발센터에서 공부하고 케어 복지사 자격증을 받았다. /박분이

나는 배움에 목이 말랐다. 일을 하면서도 잠자는 시간만 줄이면 된다는 욕심에 낮에는 계약직 일을 하면서 저녁에 배울 수 있는 곳에는 열심히 배우기로 했다. 2005년에는 케어 복지사 자격증을 받을 수 있다고 하여 야간에 여성인력 개발센터에서 공부하고 자격증을 받았다. 어릴 때 간호사가 꿈이었던 나는 그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비슷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래도 전문성이 있으니 배워보자고 생각하고 꽤 많은 사람들이 교육을 받고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시설이나 병원 등에 봉사활동을 하러 다녔다.

그러던 중 2008년, 요양보호사 자격증 취득으로 바뀌었고 함께 공부했던 동료들과 나는 다시 요양보호사 교육을 받으러 다녔다. 사실 누구보다도 나에게는 필요한 교육이었다. 늦은 나이에 결혼하여 남매를 낳아 잘 키우고 싶었는데 남편이 40대 중반에 뇌경색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당시 너무 놀라기만 했고 주변의 도움을 받아 한방병원으로 가서 침 맞고 약을 쓰다가 골든 타임을 놓쳐 남편은 영원히 한 쪽을 못 쓰게 되는 편마비 장애인이 되고 말았다.

내가 그때 좀 더 지식이 있었더라면 골든 타임 동안 빠르게 대처했더라면 더 나은 결과가 있지 않았을까? 후회도 되고 자책도 많이 했었다. 그래서 알아야 했다. 또 지금보다 조금 더 나아지기 위해 나는 더 노력해야 했다. 환자를 다루는 법과 재활에 좋은 운동, 좋은 음식과 피해야 하는 음식, 휠체어 다루는 법 등 다른 사람이 아닌 내 가족, 남편을 위한 일이기에 나에게는 꼭 필요한 배움이었다. 허투루 할 수 없었다.

2008년 겨울에 자격증을 취득하고 실습도 했다. 부지런히 노력한 덕분에 다음 해 봄부터 주간보호센터를 통해 어르신 댁에 일을 나가게 되었다. 처음엔 나도 어른들도 생소한지라 어르신을 도우러 나왔다고 하니 식구들 식사와 빨래, 시골 텃밭에 풀 뽑는 일까지 도와달라고 하셨다. 어떤 댁에서는 객지에 나가 있는 자식들 반찬을 만들어서 택배 보내는 일도 부탁하셨다.

한 달에 한 번 센터에 모여 동료들과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풀어놓고 나면 참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일들을 겪고 있었다. 시행 초기다 보니 요양보호사도 어르신들도 그 외 가족들도 이 일에 대한 개념이 부족했던 부분이다. 시간이 가고, 차츰 많은 사람들이 요양 보호사 일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고, 나도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정말 어르신을 위한 일이 어떤 것인지 몸소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사실 나에게는 또 큰 목표가 있었다. 남편의 재활치료였다. 집에 가만히 있으면 몸이 더 굳어져서 일어나기 힘들 수 있어 남편과 함께 나가서 일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봉사활동 나갔던 센터 중에서 적합한 조건이 있어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남편은 입원해서 재활치료를 받고 나는 방 하나를 맡아 24시간 간병하게 되었다. 나는 요양 보호사로 일하고 남편은 곁에서 재활 치료를 할 수 있어 정말 좋았다. 열심히 환자를 돌보고 식사와 목욕, 침실을 정리정돈하는 일을 하면서 어느 방보다 깨끗하게 유지하려고 하루 24시간 바삐 움직였다.

덕분에 내가 관리하는 우리 방은 항상 깨끗하고 좋은 향기가 난다고 식당 여사님들과 면회 오시는 보호자님들이 말씀해 주셨다. 노인전문 요양병원이다 보니 거의 모든 환자분이 내 부모님 같았다. 어릴 적 나를 키워주셨던 할머님 생각도 많이 났다. 주변 다른 보호사 선생님들께는 내가 너무 노력하는 부분이 오히려 전체를 힘들게 하는 것 같다고 쓴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기 계신 환자분들은 대부분 치매를 앓고 계셨다. 식사하고 계시면서도 늘 굶긴다고, 배가 고파서 죽겠다고 하시는 분과 물건과 돈을 도둑맞았다고 소리치시는 분, 누가 밖에서 당신을 기다린다고 하시며 밖으로 나가시는 분까지···.

나는 저마다 다른 어르신들을 한결같이 모셔야 했다. 큰 소리로 나무라면 더 악화하니 아기 달래듯 조용조용 하라는 팀장님과 노련한 보호사님의 조언이 있었기에 점점 익숙해지고 좋아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치매를 손님이라 불렀다. "아이고 할머니, 손님이 또 오셨네요. 언제 가신대요. 인제 그만 가도 된다고 하셔요." 하며 함께 웃었다. 화내고 성질부려봐야 내 손해니까 조용히 쿠키라도 건네며 달래드리면 조금씩 편안해하셨다.

하루는 송씨 할아버지께서 당신 좀 살려달라 하시며 기진맥진해 계셨다. 무슨 일이 있으시었는지 가보니 목에 뭐가 걸려 숨을 못 쉬겠다고 손짓하셨고 얼굴은 창백해져 있었다. 빠르게 조치가 필요할 것 같아 옆 어르신의 흡입기를 당겨 얼굴을 옆으로 돌리게 하고 힘껏 빨아 당기기 시작했다. 몇 번을 시도하자 커다란 거봉 1개가 나왔다. 이게 송씨 할아버지 목에 걸려 기도 근처에 있다가 조금 밀렸다 들어가고 하면서 기도를 막아 숨쉬기를 어렵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송씨 할아버지는 본인은 죽는 줄 알았다고 하시면서 정말 고맙다고 눈물을 글썽이며 말씀하셨다.

이 일이 있고 팀장님은 누워서 생활하시는 어르신께는 거봉과 같은 굵은 포도나 인절미는 절대 드리면 안 된다고 모든 보호사를 불러 말씀하셨다. 또 변비가 심했던 양씨 할머니는 화장실 가는 게 너무 괴롭다며 아예 식사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화장실 신호는 오는데 도대체가 배만 아프고 잘되지 않는다고 일주일이 넘었다며 괴로워하셨다. 우리는 식당에서 참기름을 얻어와 일회용 장갑을 서너 개 겹쳐 끼고 할머니를 눕혀 파내기로 했다. 조금 아파도 참으시라고 했다. 할머니께서는 냄새가 심하지 않으냐 걱정하셨고 우리는 참기름 덕분에 고소하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웃어넘겼다.

그렇게 몇 달을 어르신들과 보내다 남편도 집에 돌아가고 싶어 하고 집도 너무 오랜 시간 비워둔 것이 마음이 쓰여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작별의 순간이었다. 함께 고생했던 팀장님과 동료 보호사님과 차를 나누며 비록 몸은 떠나지만 마음은 변치 말자고 이야기했다. 함께 울고 웃었던 어르신들께도 부디 건강히 지내시라고 손도 잡아드리며 돌아서는데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래도 다시 돌아가야 했기에 나는 남편과 차에 올라 자동차 시동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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