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의 그랜드 투어]
또 다른 성소, 마운트 올가(Mount Olga)
아름답고 무용한 것들을 숭배하라
사막에서 쏟아지는 별의 노래

매일 아침 해가 뜰 때, 매일 저녁 해가 질 시간에 맞춰서 울룰루를 마주했다. 울룰루 주변, 불꽃처럼 빨간 흙을 맨발로 밟으면 내가 지구의 중심에 닿는다는 감각을 느끼곤 했다.
며칠 동안 울룰루를 흠뻑 만나고 난 후 애버리진(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또 다른 성지, 카타추타를 찾았다. 울룰루에서 북서쪽으로 40km 떨어진 곳에 애버리진 말로 ‘많은 머리’를 뜻하는 카타추타가 있다. 울룰루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한 개의 거대한 바위산인 반면 카타추타는 크고 작은 36개의 암석의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둥근 바위산이 거대한 존재의 머리처럼 보였다는 것일까? 원주민에게는 어쩌면 36명 거인과 관련한 신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제멋대로 상상하며 카타추타로 향했다.
애버리진들에게 이곳은 원래 성인식을 마친 남자만 들어갈 수 있는 비밀스런 장소였다. 지금은 관광객이 들어가 걸을 수 있지만 그렇다 해도 아주 일부 코스만이 개방되어 있다. 창조 신화가 스민 성스러운 곳이라 모든 지역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는 없다. 개방된 두 개의 루트 중에 나는 ‘바람의 계곡’ 코스를 택해 걷기로 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여기서 영감을 받아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내 흥미를 끌었다.
“울룰루에 제멋대로 에어즈락이라는 이름을 붙였던 백인들은 카타추타도 오랫동안 마운트 올가라는 이름으로 불렀어요. 아직도 <Mount Olga>라는 푯말이 곳곳에 남아 있지요.”

바람의 계곡 트레킹에 함께한 원주민 출신 산악가이드 글렌(Glenn)의 설명이다. 호주 정부가 1985년 이 지역의 소유권을 원주민에게 돌려주면서 원래의 이름을 되찾게 되었다고 한다.
카타추타 트레킹을 하면서 글렌은 그 지역 식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카타추타에는 레몬의 1000배가 넘는 비타민C를 가진 열매를 주는 나무도 있다. 어떤 나무의 이파리는 독성분을 품고 있는데 그 독을 약으로도 쓸 수 있어서 그들의 조상들에게는 진통과 소염제 역할을 했다는 것도 있고 기름을 짜고 염색의 재료가 되는 식물의 이름을 알려주기도 했다.
세상의 어떤 물질보다 질기고 단단한 로프가 되는 줄기를 가진 나무도 있었는데 대부분의 이름은 잊었다. 원주민 언어는 나에게 너무 생소해서 외우기는 어려웠다.
“내게 이름 다 알려줄 필요 없어. 머리가 나빠서 어차피 금방 잊어.”
일일이 수많은 식물의 이름을 말하며 가르쳐주는데 그 자리에서 바로 잊고 한 음절도 발음하기 힘든 것이 미안하고 무안해서 한 말이었다.
“계속 이름을 말하고 노래 불러줘야 해. 그래야 계속 생명을 얻어 살아갈 수 있거든.”
깜짝이야. 부르스 채트윈의 책으로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었던 <송라인>을 실감하게 하는 순간이었다. 글렌이 웃으며 대꾸하더니 짧게 어떤 노래 혹은 주문 같은 것을 불렀다.
송라인이란 단순하게 말하면 애버리진의 창조 신화 핵심을 이루는 주요 ‘개념’이다. 애버리진은 처음 세상을 창조한 조상들이 있다고 믿었고, 그 조상들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을 돌아다니며 길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의 이름을 노래로 부름으로써, 그것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게 했다고 믿는다. 그들은 세상이 노래로써 창조되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흔적인 ‘송라인’을 신성하게 보전하는 것을 생애 임무로 여겼다.
수억 년 전 생겨난 이 땅에 인간이 존재하기 시작했던 4만 년 전 처음 생겨난 원시문화는 현시대 문명인을 자처하는 우리의 방식처럼 수직으로 진행하지 않았다. 처음처럼, 그대로 이어지며 넓어지는 수평의 방향으로 다시 태어나고 꽃피운 것이다.
어느 봉우리나 모래언덕과 마주치면 그들은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고 했다. "무슨 노래를 부르는 겁니까?"하고 물으면 그들은 이렇게 답한다고 했다. "땅을 노래하는 겁니다, 땅이 더 빨리 생겨나게 하려고요.” 꿈의 시대에 그들의 조상이 노래를 불렀을 때 비로소 땅이 존재하게 되었던 것과 똑같이 노래로 불려야 하고 그때야 비로소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 거라고 믿는다.

내가 호주의 원주민 문화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오래전 나와 함께 일했던 동료 저스틴의 외할머니 때문이다. 저스틴은 외가 쪽으로 호주 원주민, 애버리진의 피가 섞여 있다. 그의 집에는 애버리진 아티스트인 외할머니의 작품이 있었는데 점으로 찍어 원시적인 동심원을 기본 패턴으로 하는 것이었다.
추상화처럼 보이지만 매우 구체적인 사물, 동물을 그린 것 같기도 했고 얼핏 코스모스, 우주처럼 보이기도 했던 그림의 제목은 <어머니의 땅>이라고 했다. 저스틴의 할머니 작품과 닮아 보이는 그림을 카타추타 울룰루 국립공원에서 자주 만날 수 있다. 점점이 이어진 이야기, 점점이 이어진 세계가 애버리진이 창조한 이 세상이다.
“프리티 벗 유스리스(pretty but useless) 예뻐. 하지만 쓸모가 없는 녀석이지.”
비가 오면 보라핑크색 꽃이 피어나는데 걸음을 멈추게 할 정도로 예쁘다고 했다. 이름은 ‘말라말라’다. 글렌의 설명이 공연히 야박하고 서운하게 들려서 이번에는 내가 계속 이름을 불러줬다.
"말라말라 malla malla 말라말라 말라말라"
거대한 암석과 진흙의 바람 계곡을 밝히는 아름다움, 밝음, 예쁨이 존재 이유인데 쓸모까지 있어야 한단 말인가?
울룰루와 카타추타가 보이는 아름다운 모래 언덕에서 애버리진의 전통 약초, 채소로 맛을 낸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글렌이 설명한 대로 갖가지 식물로 기막힌 카나페 4가지와 샴페인, 애피타이저와 앙트레, 메인 코스, 디저트까지 5코스의 음식을 선택하면 세심하게 마리아주한 와인이 함께 나온다.
맛있고 아름답고 너무나 친절하고 꿈꾸는 것 같은 저녁 시간이라 “완벽해, 행복해, 너무 멋있어”를 연발하다 보면 진짜 그 저녁의 하이라이트 시간이 다가왔다. 식탁의 조명마저 모두 끄고 쏟아지는 별하늘 아래 스타 가이드는 한 줄기 레이저 빛을 하늘을 향해 보내며 별자리를 설명해 준다.
애버리진 방식 송라인으로 그들의 땅을 찾아가는 법을 알려주는 것을 듣다보면 이내 그 벅찬 신비감에 취하고... 이내 기절하게 된다. 아름답고 무용한 것들을 사랑하고 숭배하라.
관련기사
- [박재희 더봄] 세상의 중심, 울룰루(Uluru)와 만나는 세 가지 방법
- [박재희 더봄] 세상의 중심·지구의 배꼽, 울룰루(Uluru) 로 간다
- [박재희 더봄] 인생 리셋, 절대 반지를 찾아서
- [박재희 더봄] 밀포드,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길
- [박재희 더봄] 도쿄, 꿈이 없는 디스토피아 메가시티
- [박재희 더봄] 한국의 베로나···춘향전부터 혼불, 미스터 선샤인까지
- [박재희 더봄] 청주 여기, 연진아 나 지금 되게 신나~
- [박재희 더봄] 전설따라 이야기따라 남도로 가볼까나···남원 이야기여행
- [박재희 더봄] 피스테라, 세상의 끝에서 사랑을 외치다
- [박재희 더봄]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북정마을 산책
- [박재희 더봄] 치앙마이 한달살이, 뭐할라고 가는데요?
- [박재희 더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빈둥거림 처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