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의 그랜드 투어]
삼보 이상 승차족의 변신
절대 반지 원정대의 탄생
그레이트 웍스 그랜드 투어

뉴질랜드는 지구에서 하루를 제일 먼저 시작하는 나라다. 인생 리셋 트레킹을 결정한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라는 뜻으로 이해하기로 했다. 게다가 <반지의 제왕> 영화에서 반지원정대가 절대 반지를 찾아 떠난 곳이기도 하지 않은가. 아주 딱이다.
지구에 보호해야 할 환경이 어디 여기뿐이겠냐만 밀포드는 세계 인류 유산으로 지정된 청정자연 보존지역이다. 캠핑은 아예 불가능하다. 중간 퇴로가 없는 길을 걷기 위해서는 트랙 내 오두막의 최대 수용인원 40명에 들어야 한다. 여행사를 통해 럭셔리 롯지를 이용하는 50명을 포함해도 하루 최대 90명이다.
오두막 확보는 온라인 예약만 가능하다. 최소한 6개월 전(성수기는 8개월 전)에 확정해야 한다. 오로지 걷고자 하는 사람들이 예약 사이트가 열리기만을 기다렸다가 광클릭의 속도전에 돌입하므로 눈 깜짝할 사이에 예약은 끝난다. 이것이야말로 조상의 은덕을 확인할 기회다. 선착순 40명. 적어도 조상 3대의 복을 받아야 획득할 수 있다는 오두막 잠자리 얻기 전투에 성공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세계 트레킹족들이 뽑는 ‘죽기 전에 반드시 어쩌고저쩌고’ 버킷리스트에서 밀포드가 언제나 최고로 꼽히는 데는 어쩌면 이런 애태우기 작전이 한몫을 하는지도 모른다.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던 열망이 살금살금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인간의 발길을 허락한 지 백 년도 채 되지 않은 원시의 땅, 태초의 길 밀포드로 떠난다. 달력을 꺼내고 떠나는 날짜에 예쁘고 동그란 반지를 그려 넣었다. ‘리셋 반지 원정대’. 이름을 지어놓고 보니 무척 잘 어울렸다고 말하고 싶지만 솔직히 좀 생뚱맞고 오글거리는 감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마음에 콕 든다. 그럼 된 거다.
거창하게 ‘남반구 원정’이라고 했으나 우리는 사실 평소 ‘삼보 이상 승차’를 부르짖는 탈것 애용자들이자 어눌한 초보 트레킹족이다. ‘즐기는 산, 즐거운 산’을 부르짖으며 등산보다는 놀멘 놀멘 ‘즐산’하는 사람들이고 어마어마한 산보다 산으로 우길 수 있는 언덕을 선호하던 사람들이 어쩌다가 이름에 떡하니 ‘그레이트’가 붙어있는 그레이트 웍스(Great Walks) 트레킹을 결정한 것이다. 기껏해야 수다 떨며 도시락 먹는 즐거움으로 산에 오르던 사람들이 말이다.

무작정 원정을 꾸리기로 결정한 즐산 일곱명 원정대의 막내 브리아나는 하늘에서 별 따기보다 힘들다는 대기업 인턴 기회를 얻은 말하자면 비정규직 2년 차 20대 MZ 대표주자다. 30대 스텔라는 뉴질랜드에서 살면서 평생 산행을 몇 번 해보지 않은 실내 생활 영위자인데 우연히 경치 좋은 피오르드 사진을 보냈다가 얼떨결에 뉴질랜드 지부장 역할을 하게 되었다. 40대의 박 팀장은 명성이 자자한 훈남 마케터이나 연애 소질이 없는 모태 솔로로 비혼으로 가는 위험을 직감하고 배낭을 쌌다.
우리 친구들 가운데 준비성과 최강 정보력을 갖추어 절대간사로 추대된 멤버도 있다. 원정대의 거의 모든 것을 꼼꼼히 챙기는 숙명을 타고난 절대간사와 더불어 새로운 용품의 성능 비교와 체험을 위한 발빠른 구매력으로 즐산의 스타일을 책임지는 친구 그레이스도 있다.
원정대의 리더는 짱가캡틴이다. 20대부터 50대까지 세상에서 보낸 시간의 길이가 다르고 제각각 개성의 사람들을 챙기는 캡틴은 평화 시에는 존재감을 보이지 않다가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여지없이 나타나 대원을 챙기고 짐꾼 역할을 자처한다. 마지막으로 원정대의 대표 말썽꾼이자 안전핀인 내가 있다.

하는 일이 다르고, 숨긴 아픔이 다르고, 보이는 모습과 생각이 다르고, 견디지 못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도 다른 사람들. 우리는 늘 ‘언젠가 한 번’이라고 습관처럼 말해 왔지만 그날은 저절로 찾아오지 않는다는 진실을 받아들였다. 사표 내기보다 어렵다는 장기 휴가 신청서를 제출했고, 심지어 한 친구는 오래 고민한 퇴사를 감행하기도 했다. 삶의 제자리 걸음을 시작한다. 리셋을 향한 걸음을 마치면 우리는 정말 달라져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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