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의 그랜드 투어]
리콜, 리셋, 리로드 릴리리라네
‘언젠가’ 대신 ‘지금’이라 말하기
리셋 원정대의 뉴질랜드 트래킹

인생도 리셋이 될까?

무언가 잘못 되어간다고 느꼈을 때, 세상이 정한 방향을 따라 더는 가고 싶지 않으면서도 길은 보이지 않던 그 무렵, 뉴질랜드 친구가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다. 뒤틀고 끙끙거린 지 오래면서도 어쩌지 못하던 병증을 끝내야 할 타이밍이었다.

뉴질랜드 피오르드랜드 미러 레이크 /게티이미지뱅크
뉴질랜드 피오르드랜드 미러 레이크 /게티이미지뱅크

“사람한테도 리셋 키가 필요해!”

“컴퓨터는 키 몇 개만 누르면 되잖아. 새로고침, 초기화, 프로그램 복원 뭐 이런 거 말이야.”

“사람이 하느님보다 자비심이 넘치는 것 같아. 컴퓨터를 창조하면서 다시 시작할 기회를 줬으니까.”

당시 우리는 각기 다른 이유로 리셋(Reset)이라는 화두를 끙끙 앓고 있었다. 누구는 아픈 연애 후 새로운 인연을 만난 참이었고, 이직과 전직의 갈림길에서 코끼리코 돌기를 반복하며 휘청거리던 이도 있었으며, 흡혈마귀 같다는 회사를 박차고 나온 친구는 속 시원하다고 외치는 중에 깊은 한숨을 쉬곤 했다. 나로 말하면 명랑만화 캐릭터 가면을 쓴 채로 좀비가 되어간다고 느끼는 중이었다.

근무 중 땡땡이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주말의 시체 놀이로도 피곤은 가시질 않았다. 친구와 번개 술 한 잔도 별 소용이 없었다. 만성 알레르기처럼 친근하기까지 했던 불안증의 수위가 점점 높아져 열병이 되고 있었다. 

빙하 호수에 산이 완벽하게 비치는 장관, 눈이 덮인 산 아래 따뜻한 풀과 꽃들의 키가 크게 자라는 평원의 사진을 공유하면서 우리는 이름도 거창한 일명 남반구 원정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길이래.”

“죽기 전에 꼭 걸어야 할 길에 선정된 길이라는데?”

“한 번 걷기 시작하면 중간에 되돌아 나올 수 없대.”

“퇴로가 없는 길이라니 뭔가 메시지가 강력하다.” 

뉴질랜드 남섬 밀포드 트랙 /사진=박재희
뉴질랜드 남섬 밀포드 트랙 /사진=박재희

원래 끌어다 붙이기 시작하면 모두 상징이 되고 의미가 있다고 느껴지는 법이다. 죽기 전에 한 번은 걸어야 할 길이(대체 이런 건 누가 정하는지 모르겠다고 매번 불평하는 쪽이지만 왠지 그때는 거부할 수 없었다.) 떡하니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어린 시절 닳도록 읽었던 책 <정글북>을 써서 노벨상을 받은 키플링 할아버지가 ‘세계의 불가사의 중 하나’라고도 불렀다는 곳, 밀포드 트랙으로 떠나기로 했다.

뉴질랜드의 마오리 신은 명령하고 있었다. 당장 피오르드랜드로 와서 신내림을 받으라고.

"레드~ 썬!"

열이 끓고 시름시름 앓고 오한과 발열을 거듭하던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뉴질랜드의 서남쪽 끝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간절했던 리셋 키를 찾을 수 있을지, 과연 삶의 제자리 찾기가 가능할지, 왜 하필 밀포드까지 가야 하는지 아무것도 확실하진 않았지만 순식간에 정해졌다. 언젠가란 저절로 찾아오는 시간이 아니니까.

문득 피오르드랜드에서 불어온 빙하 바람이 뺨을 스치더니 도저히 알 수 없는 보이지 않은 힘이 나를 이끌었다. 라고 하면 새빨간 거짓말이고 갑작스레 사랑에 빠지듯 그렇게 되었다. 어떤 상대가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 기다려 왔던 이가 누구였는지를 즉각 알게 되는 것처럼, 뉴질랜드에서 날아온 한 장의 사진 때문에 남반구로 떠날 운명임을 받아들였다고 해두자. 너무 따지지 말고. 

뉴질랜드 피오르드랜드 미러 레이크 /게티이미지뱅크
뉴질랜드 피오르드랜드 미러 레이크 /게티이미지뱅크

 

관련기사

저작권자 © 여성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