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의 그랜드 투어]
목적지 0.00km 땅끝서 외치는 사랑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더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여

“오 마이 갓! 저게 누구야? 저 사람 혹시 한스······ 아냐?”

몇 발짝 앞서가던 케이가 갑자기 획 돌아서더니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스페인 피스테라(Fisterra)에 도착한 때는 늦은 오후였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던 시대에는 세상의 끝이라고 여겼던 곳이다. 이름부터 끝(Fis) 땅(terra), 땅끝마을이다. 처음 산티아고 순례를 마치고 드디어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표식 0.00km 표식을 보고 뭉클했던 그 순간, 돌아선 케이의 머리카락처럼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선 이는 한스, 분명 한스였다.

산티아고 순례 후 많은 사람이 찾는 땅끝 마을 피스테라(fisterra) 0.00km 더 이상 걸어야 할 길이 남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상징적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산티아고 순례 후 많은 사람이 찾는 땅끝 마을 피스테라(fisterra) 0.00km 더 이상 걸어야 할 길이 남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상징적이다. /게티이미지뱅크

그는 그런 사람이다. 한 번이라도 마주쳤다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키가 무척 컸고 북유럽형 미남이라고 할 외모의 소유자였다. 사람들과 섞여 있어도 늘 그의 머리는 쑤욱 나와 있었다. 게다가 사교적이다. 사교성은 순례길에서 흔치 않은 특성이다.

산티아고 길을 걷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일종의 불문율 가운데 일시적 비 사교성의 옷을 입는 것도 포함이다. 짧게는 한 달, 길게는 40일 이상 스스로를 세상에서 분리시켜 걷고자 하는 사람들끼리 소통 의무를 제거해 주면서 자유를 누리는 것이라고나 할까? 내가 걷는 동안 일종의 금기를 깬 사람으로는 한스가 유일하다.

“하이 레이디 필그림, 오늘 컨디션 어때? 내 이름은 한스야. 이름도 한스 성도 한스 그래서 한스 한스지. 너도 그냥 한스로 부르면 돼. 나는 암스텔담에서 왔어. 오늘이 10일째야. 와우 반갑다. 네 이름은 뭐니? 어디서 왔니?···”

첫 만남부터 시끌벅적 좋은 말로 붙임성이 넘치는 한스였다. 그는 8년간 동거하던 애인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고 했다. 메모 한 장을 남기고 짐을 싸서 사라졌다니 한마디로 모질게 차였다는 것이다.

“너무 슬프고 허망했어. 살고 싶지도 않고. 8년 동안 나는 제니를 정말 사랑했거든. 그녀가 없는 삶은 끔찍해. 몇 번이나 죽을 생각을 했거든. 난 살아갈 자신이 없어. 그래서 걷는 거야. 내가 삶을 포기하지 않도록.”

처음 만난 사람에게 몇 번 자살도 생각했다는 고백에 난 어째서 염려나 동정심보다는 일종의 강력한 추리를 하게 되었을까? 함량 초과 개방성에 8분도 안 되어 난 질리고 말았는데 의외로 한스는 순례길에서 유명하고 인기가 있었다. 누구나 아는 키 크고 잘생긴 순정남은 어쩐 일인지 내게는 순정을 팔고 광고하는 떠벌남으로 보였지만 말이다. 

“한스가 울면서 내게 프러포즈했어.“

“한스? 브로크 업 한스 말이야?”

까미노에서 한스는 흔한 이름이다. 나는 독일의 한스, 요리사 한스와 구별하기 위해 그를 브로크 업 한스라고 불렀다. 이미 한스에게 마음을 연 케이는 내 농담에 웃으면서도 원망이 섞인 투로 말했다.

“오랫동안 망설였대. 산티아고에 도착한 날, 나라면 그 여자를 잊을 수 있겠다고 하더라고. 기회를 달라며 울더라고.”

케이는 오레곤에서 온 변호사다. 아스토르가(Astorga)를 지나면서부터 신기할 정도로 자주 만나면서 친해졌다. 평생 여성 편력을 그치지 않은 아버지 때문에 남자, 지속적 관계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진 여성이다. 다치고 싶지 않아 사랑만은 피해 왔다는 지적이고 똑똑한 케이가 어떻게 한스에게 마음을 주었는지는 불가사의였다. 축하의 말은 나오지 않았고 케이는 섭섭한 눈치였다. 

“재희야, 왜 넌 한스를 싫어해? 말은 많지만 착한 남자잖아.” 

그러게 말이다. 말이 많다는 이유만으로도 싫어할 만큼 지나치게 수다스럽기도 하지만 짝퉁! 이것이 내가 한스에게 가진 느낌이었던 것 같다. 말콤 맥도웰이라는 작가는 어떤 사물, 누군가를 만났을 때 섬광처럼 처음 일어나는 순간적인 판단을 '블링크'라고 했다. 나는 브로크 업 한스에게서 이를테면 모조품을 마주했을 때와 같은 블링크의 순간을 느꼈다. 나는 한스에게 일종의 연민도 느꼈다. 누구나 알아보기 쉬운 짝퉁을 장착하고 뿌듯해하는 사람을 마주할 때의 불쾌는 위험보다는 민망함에 가까우니까.

다른 의미로 그에게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던 걸까? 사흘 후 케이와 마드리드에서 만나기로 했다던 한스가 우리 앞에 있었다. 모든 것은 정말 운명이라고 설명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산티아고에서 마드리드행 비행기를 타려던 케이가 마음을 바꾸기까지는 예약이 엉키고, 내가 보여준 세상 끝 노을 사진에 이끌리고 등등의 이유가 있었지만 나는 그것이 진심으로 순례를 마친 사람에게 베풀어진 축복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예정대로라면 케이는 마드리드에 있어야 하고, 사랑 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 순수한 남자 한스, 케이 덕분에 다시 살아볼 용기를 낸 한스 역시 산티아고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새로운 앞날을 위해 따로 시간을 보내기로 했던 연인이 피스테라에 있었다.

바람에 밀리듯 휘청이며 돌아선 케이의 어깨 뒤로 브로크 업 한스가 보였다.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운 빛으로 하늘을 물들이는 태양은 급하게 바다로 떨어지고 있었고, 지는 해보다 더 뜨거운 열정적인 한스는 과장된 몸짓으로 어떤 여인을 쓰다듬으며 기다란 상체를 구부린 상태였다.

피스테라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거친 파도와 거대한 바다 뒤로 해가 떨어진다. /게티이미지뱅크
피스테라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거친 파도와 거대한 바다 뒤로 해가 떨어진다. /게티이미지뱅크

"푸하하하핫 말도 안 돼.”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뒤늦게 실소를 삼키려 애쓰는 나와 망연한 케이가 함께 지켜본 것은 실로 한스다운 키스였다. B급 에로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로맨틱은커녕 지켜보는 사람을 약간 웃게, 그리고 민망하게 만드는 그런 가짜 키스 말이다. 사랑하는 여인이 떠나서 죽고 싶던, 인생을 구원해 줄 케이에게 눈물의 프러포즈를 했던 한스는 수다스럽게 다시 사랑을 외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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