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미옥의 살다보면2]
근엄하시던 아버지가 빨래를 널고
평소 안 하시던 안부전화를 하셨다
며느리 덕에 뒷방 늙은이 신세 벗어

(전편에서 이어짐)
집안에 가장 높은 어른이 빨래를 널고 계시다니···.
“저 아이가 날마다 나를 놀라게 한단다. 네가 봐도 신기하지? 허허.”
아버지가 저리 표정이 밝았던 적이 언제 있었을까! 농담은커녕 소리 내어 웃는 모습도 기억 안 나는 늘 조용하신 아버지셨다. 그날도 어른 아이 모두 각자가 할 숙제를 그녀에게 배당받아 행하는 중이었다.
혹 떼려다 혹만 부치고 올라오는 귀경길에 내 마음은 멘붕에 빠졌다.
생각해 보니 어른이라는 위치만 생각하는 나의 조신한 행동은 시부모와의 거리를 더 멀게 했다. 처음부터 어른이 되는 것도 아닌데 나는 나이에 급을 두어 대했다. 나는 아버지의 담배도 걱정되었다. 젖내를 풍기며 기어다녀야 할 조카에게서도 담배 냄새가 났다. 겸연쩍은 마음에 아버지에게 다가가 눈치를 주면 담배는 아버지의 유일한 친구라며 그녀가 오히려 아버지 편을 들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시장도 자주 누비고 다녔다. 시장에서 장사하는 엄마의 친구분은 침이 마르도록 그를 칭찬하며 부러워하셨다. 저녁을 먹고 나면 모두 아버지 방으로 모여 같이 TV를 보거나 오락을 했다. 그들과 화투를 치며 10원을 놓고 농담하며 실랑이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나 혼자 쑥쓰럽고 어색했었다.
아버지는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사는 것을 우리에게 강조하셨다. 우리가 안부 전화를 하면 쓸데없이 전화한다고 나무라시고 요금 많이 나온다고 얼른 끊으시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가끔 전화를 다 하셨다.
“아버지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요? 왜 전화하신 거예요?”
처음 전화 받던 날 너무 놀라서 물으니 며느리가 해보라고 했다며 민망해하셨다. 한 마디하고 끊으시던 안부 전화가 두 마디 세 마디가 되더니 나중엔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시장길도 소풍 길도 동행하고 음식을 함께 먹고 소소한 집안일도 함께 나누는 것, 호들갑스럽지 않아도 평범한 시간을 함께하는 것이 사랑이었다. 그녀 덕분에 아버지의 하루는 재밌는 일상으로 이어져 갔다.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는 천덕꾸러기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지 않았다.
30년 전 백수였던 큰동생과, 군인이었던 막내는 금형업계에선 알아주는 기술자가 되었다. 평범한 사원으로 들어가 둘 다 최고경영자 자리까지 올랐다. 부부가 때론 투덕거리고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 최고라고 격려하며 고마워하는 모습이 참 예쁘다.
동생은 코로나가 온 세상을 휘감고 있던 시간에 백신을 구하기 위한 프로젝트인 ‘국민을 살린 31인의 특공대’ 소속의 한 사람이 되어 밤낮없이 일한 산업 역군이다. (매일경제뉴스 "k 주사기, ‘크리스마스의 기적‘뒤엔 31명의 특공대가 있었다")
긴박했던 시간 속에 두 동생의 힘든 노고를 우리가 지켜봤기에 더 자랑스럽고 멋지다. 살벌하고 무서운 뉴스가 너무 많은 어수선한 일상이지만 산업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며 나라를 빛낸 이런 자랑스러운 뉴스가 1면에 나오는 일이 많았으면 좋겠다. 다시 코로나가 확산한다는 뉴스가 마음을 어수선하게 한다.
사람의 지혜는 시간의 자식이라는, 개념 하나를 굳히는 것은 몇 해로 될 일이 아니라고 누군가 말한다. 오랜 시간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우리 형제 우리 아이들에게도 행동으로 보여 주며 지혜를 준 그녀가 자랑스럽다.
지인과 카페에서 만나 옆 좌석 80대 쯤의 어르신들 대화를 엿듣는다.
“인생 다 살고 나니 배우자 잘 만난 거가 최고 복인 거 같아. 덕분에 가족 형제 모두 어우러져 잘 지내고 나도 이렇게 잘살고 있는 거 아닌가.”
마주 앉아 있던 할머니가 옆에 있는 남편에게 물었다.
“당신은요? 당신은 날 잘 만난 거 같아요?”
함께 있을 때 고백하면 어디가 덧나는지 우리 부모님들은 아직도 마주 보면 부끄러워 고백 못 하는 말이 있다. 당신을 만난 것이 나에겐 최고의 복이라는···. 할아버지가 못 들은 척 카운터에 소리 지른 한마디에 우리는 풋 하고 웃음이 터졌다.
“이 보소, 커피가 와 이래 뜨겁니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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