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권의 고향 정착기]
정월 대보름 저녁 달집 태우며
주민들 기원비 내고 소원 빌어
기원비는 봄철 나들이 비용에

달집이 활활 타오르자 마을 사람들은 너나없이 각자의 소원을 정성껏 빌었다. 달집 태우기 이미지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달집이 활활 타오르자 마을 사람들은 너나없이 각자의 소원을 정성껏 빌었다. 달집 태우기 이미지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정월 대보름날 일요일 아침에 새 이장이 전화했다. “형님! 오늘 오후에 달집 짓는 것 좀 도와주세요!” 나는 새 이장의 요청에 흔쾌히 승낙하고 낫과 톱을 챙겼다. 요즈음은 사찰에서도 정월 대보름날 달집을 짓고 산사 음악회를 연다. 여기저기 지자체에서도 홍보 차원에서 달집을 많이 짓는 모양이다.

벌써 40년이 넘고 50년이 다 되어 가는 추억인데, 고향을 떠나기 전 이 동네에서 마지막으로 달집을 짓던 때 생각이 났다. 당시에, 농촌에서 정월 초하루부터 정월 대보름날까지는 농민들의 휴가 기간이었다.

초하룻날 새벽에 부모님께 먼저 세배를 드리고 그다음 조상님들께 차례를 지내고 나면 친척들끼리 인사를 하러 다닌다. 보름 동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밥하고 청소하는 것 말고는 일을 하지 않았다. 어린 우리는 방학인데 숙제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마을 형이나 동생들과 어울려 놀기 바빴다.

그동안 어른들은 지신밟기 한다고 꽹과리, 징, 북과 장구를 앞세운 사물놀이패들이 집으로 들이닥치기도 하고 아이들은 쥐불놀이한다고 밤이면 깡통에 불을 담아 온 들판을 쏘다녔다. 대보름날이 농민들에게는 마지막 휴일이라 아침에 오곡밥을 해서 나물과 함께 집에서 키우는 소에게 먹이면 소가 올해는 무슨 농사가 잘될 것인지 알고 그 음식을 먼저 챙겨 먹는다. 아이들은 또 여러 집 찰밥을 먹어야 좋다고 이집 저집으로 밥을 구걸하러 다녔다.

어른들은 오후가 되면 본격적으로 각자의 대밭에서 대나무를 베고 솔가지도 꺾어서 짊어지고 나왔다. 그리고 타작하고 남은 집단을 한 짐씩 지고 나와서 대나무와 솔가지로 엮은 달집 안에 방을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새끼줄로 달집을 칭칭 묶었는데 그 새끼줄에다가 돈도 걸고 또 가족들의 소원을 적어서 걸기도 하였다. 소중했지만 필요 없어진 물건들을 가져와 달집에 던지기도 하고 어떤 이는 지난해 집 문지방에 붙였던 부적을 떼어서 불타는 달집에 던져 넣었다. 

정확하게 몇 년도인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을 때이니 꽤 오래전의 일이다. 우리 동네에서 면사무소 다니던 최홍수라는 형님이 있었는데 달집을 못 짓게 막아섰다. 이미 달집은 다 완성이 되어 달만 뜨면 불을 붙일 참이고 동네 아낙네들은 보름달을 기다리며 각자 자기 가족들의 건강과 안녕을 빌 준비를 다 하고 있었다.

마을 앞 빈 논에다 마을 사람들이 달집을 만들고 있다. /사진=정진권
마을 앞 빈 논에다 마을 사람들이 달집을 만들고 있다. /사진=정진권

달이 뜨려고 하는데 면서기 홍수 형님과 그보다는 나이가 더 많은 해군 출신의 형님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둘이 싸우는 사이에 정월 대보름달이 떠오르고 동네 어른 한 분이 달집에 불을 붙였다. 어머니와 나도 떠오르는 보름달을 보며 뭔가 우리 가정을 위하여 간절하게 기도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해 이후로 마을에서 정월 대보름날 달집에 소원을 비는 행사는 보지 못했다.

마을회관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여 나가보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일요일이다 보니 마을에서 살고 있지는 않지만, 외지에서 부모님을 뵈러 오는 동생들도 많이 왔다. 웃담에 백태민과 뱉담에 정해식, 그리고 골담에 강남주나 유기호 등과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여성분도 몇 분 보였다. 찰밥과 나물 그리고 떡과 회, 시래기 된장국이 나왔다.

점심을 먹고 나니 동네 아주머니들이 대충 형님과 창환 형님 앞에 줄을 서느라 난리다. 달집에 달 가족들 축원지를 쓰고 기원비를 내기 위해서였다. 아주머니들은 10만~20만원의 기원비를 예사롭지 않게 여기고 내었는데 서로 빨리 접수하려고, 또 서로 많이 내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축원지에다가 아들과 손자 손녀 등의 이름을 기다랗게 적어 나갔다.

‘달집 기도가 영험이 있나?’ 나는 몹시 의아스러웠지만 아주머니들에게 질세라 기원비 10만원을 접수했다. 알고 보니 이렇게 모은 자금으로 동네 사람들이 벚꽃이 필 때면 봄 소풍 구경을 나간다고 한다.

점심을 먹고 달집을 지으러 나가니 이미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예전에는 달집을 정자나무 앞마을 공터에 지었는데 이번에는 정자나무 인근 빈 논에다 자리를 잡았다. 나는 직접 대나무를 베어야 하는 줄 알고 톱을 들고 나갔는데, 이장이 자기 집 아래 길가 대밭에서 대를 준비해서 트랙터로 끌어다 놓았다.

나무는 가영이가 자기 단감 과수원에서 전지한 나무들을 운반차로 많이 실어다 놓았다. 포크레인 기사인 태민이는 포크레인을 가지고 와서 나무를 쌓고 대나무를 세웠다. 형식이는 길이가 긴 대나무 하나하나를 절반씩 기계톱으로 잘랐다. 도구가 없는 우리들은 큰 대나무 대여섯 개를 묶었는데 이것을 태민이가 포크레인으로 세웠다. 다시 우리들은 남은 대나무 하나하나를 커다랗게 세워진 달집 대나무 사이사이에 집어넣었다.

이장이 가는 철사를 가져와서 형식이네 트랙터에 올라타고 대나무집을 한 바퀴 돌면서 묶었다. 누군가가 철사가 너무 가늘다고 하니 기호가 자기 집으로 달려가서 굵은 철사를 들고 왔다. 이번에는 또 경수 형님이 그 정도 굵기는 금방 녹아내린다고 자기 창고에서 더 굵은 철사를 들고 왔다.

달집 짓기 작업에 동참한 젊은 여성분은 달집 문 앞에 제(祭)를 지낼 수 있도록 짚을 들고 와서 깔았다. 달집에 문이 있어야 한다고 문을 만들고 상태 형님 형수님은 새끼를 꼬아서 축원지를 달 수 있게끔 들고 왔다. 해식이는 축원지를 달 새끼줄을 달집 허리에 빙 둘러서 감았다. 그리고 달집 문 앞에다 자리를 깔고 제를 올릴 준비를 했다.

정월 대보름달이 떠오르기 전에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각자 절을 하고 막걸리를 부었다. 그리고 둥근 달이 떠오르자 마을에서 가장 소원이 많은 아주머니가 불을 지폈다. 달집은 활활 타오르고 참석한 마을 사람들은 너나없이 각자의 소원을 정성껏 빌었다. 예전에 비해서 생솔가지가 없어서인지 달집은 금방 타버리고 아래로 주저앉았다. 다 타버린 달집의 불꽃을 산불감시원과 형식이가 지키고 있었다. 

축원지를 단 새끼줄에 감긴 채 마을 사람들이 만든 달집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사진=정진권
축원지를 단 새끼줄에 감긴 채 마을 사람들이 만든 달집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사진=정진권

이장이 마을회관으로 오라고 해서 회관에 들어갔더니 모두 모여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면사무소에서 여직원도 나오고 저녁에는 부모님이 마을에 계시지도 않은 전동한 동생도 와서 같이 어울리며 식사하고 있었다. 이장이 선물 받은 것이라며 생굴을 쪄서 내놓았다.

저녁에는 연세가 많이 든 어른들은 보이지 않고 낮에 여성분들이 앉았던 안쪽 방에 젊은 남자들이 다 모였고 여자들은 바깥방에 자리를 잡았다. 예전에는 부모님들이 모여서 마을 일을 의논하고 농사를 지었었는데 이제 그 자리에 자식들이 모였다. 나는 마치 삼국지를 읽고 다시 후삼국지를 읽고 있는 듯했다.

후배들이 술잔을 권하고 나도 동생들에게 막걸리나 소주를 한잔씩 권했다. 술도 마시지 않는 태민이가 입대하기 전에 있었던 얘기를 꺼내서 분위기에 불을 붙였다. 입대 영장을 받은 친구들끼리 모여서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돌면서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많이 마셨던 얘기다.

오랜만에 가까이해보지 못했던 동생들과 어울려 긴긴밤을 꼬박 밝히고 싶었는데 이 동생들도 환갑이 가까웠지만 그래도 내가 부담스러운 모양이다. 나는 왜 상근 동생이 마을의 새 이장이 되어야 했는지 이 상황에서 이해가 되었다. 주말에 부모님을 뵈러 오는 동네 동생들이 나이가 어린 새 이장이 대하기가 편한 모양이다.

산불감시원과 형식이가 저녁을 먹으러 들어오기에 자리도 내줄 겸 밖으로 나왔다. 허공에 두둥실 떠오른 둥근 달을 보니 온 세상이 풍요로움으로 가득 차는 듯하다. 올해는 내 마음도 둥글게 만들어서 내가 하는 처신이나 말이 주위 사람들을 좀 더 편안하게 해 주는 한 해가 되게 해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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