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권의 고향 정착기](1)
어머니가 요양원 들어가시자
고향집 돌볼 사람 없어 낙향
첫 농사에 갖가지 시행착오

아내가 수확을 앞둔 매실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다. /사진=정진권
아내가 수확을 앞둔 매실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다. /사진=정진권

태어난 사람은 언젠가는 임종을 맞이해야 한다. 태어나서 어릴 적에는 부모님과 형제들의 울타리 속에서 대체로 안온하게 지내는 편이다. 앞으로 긴 인생의 여정을 살아갈 준비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물론 모든 분들이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대체로 긴 시간 동안 학습을 하면서 미래에 자신의 직업을 준비해 가는 것이다.

학업을 마치고 결혼을 하다보면 가정이 생기고 그 책임자가 된다. 자식들이 생기고 한 가정을 꾸려가야 하는 처지가 되고 보면 가족들의 삶을 영위하게 하는 자금을 벌기 위해서 부모들은 사투를 벌인다. 긴 시간을 자식들을 키우고 뒷받침하는데 온갖 열과 성을 다 쏟아 붓는 것이다.

그러다가 자식들을 위한 그 시간이 끝나고 나면 그때야 ‘휴~’하고 한숨을 쉬게 된다. 그리고 돌아서면 이제는 의지하고 살던 부모님들이 이 세상을 떠나는 시간이 온다. 한평생 정들었던 부모님과 이별의 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부모님을 보내 드리고 나면 ‘나는 언제쯤 이 세상을 떠날 것인가?’라는 의문이 든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시간이 다가오는 것이다. ‘인생이란? 돌이켜보니 긴 인생이 다 흘러갔는데 한 번뿐인 인생에서 진정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80살이나 100살까지 산다고 치자, 인생을 토막 내어 10년 단위로 나누어서 분석해 볼 수도 있겠지만 크게 3등분으로 나누어 보면 학습을 하면서 준비하는 어린 시절과 가정을 꾸리고 가족들을 돌보는 청장년기와 마지막 휴식의 시간 노년기로 나누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이제 자신에게 주어진 노후의 삶은 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 옛날 인도 어느 지역에서는 남자가 노년기에 이르면 집을 떠나 유랑 생활을 한다고 했다. 유랑 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서는 자신이 긴 인생에서 배운 지식으로 마을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언젠가 나는 도시에서의 삶이 마무리되면 미련 없이 고향땅을 찾아가리라 결심을 하였다. 2020년 당시 나는 아직 직업이 다 마무리되지는 않았지만 내년에는 귀향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어머님이 요양원에 들어가시니 고향집이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몇 년 후면 허물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머님이 계실 때도 일 년에 적어도 4번 이상 고향에 내려와서 머물고 가거나 어머님을 모시고 서울로 상경했다가 다시 고향에 모셔다 드리는 일상이 연속으로 이어졌었다.

 

발아된 모판을 못자리 논에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정진권
발아된 모판을 못자리 논에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정진권

드디어 2021년 1월에 나는 고향집으로 주소를 옮겼다. 매달 두 번씩 고향에 내려와서는 집을 돌아보고 어머님이 계시는 요양원에 면회를 하고 올라가기를 반복했다. 고향 마을 형님에게 논을 임대 드렸었는데 올해부터 내가 직접 농사를 짓겠다고 했다. 그리고 마침내 농사를 시작했다.

종자벼에 물을 부어서 담갔다가 싹을 틔웠다. 발아가 시작되면서 씨앗을 모판에 뿌리고 상토와 비료를 넣었다. 그리고 그 모판을 비닐 등 보온재로 덮어서 온도를 맞추어 주고 간간히 물을 주어서 싹이 올라오고 뿌리가 잘 내리도록 해 주었다. 어느 정도 발아가 되면 덮었던 보온재를 거두고 모판을 못자리 할 논에 옮겨서 물을 흠뻑 먹게 하면서 키운다.

드디어 6월 초에 모내기를 하게 되었다. 내가 모내기를 해야 할 논은 6600㎡(약 2천 평)인데 세 군데로 나뉘어져 있다. 나는 그냥 기계로 다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것은 대단한 착오였다. 못자리 논에 있던 모판을 다시 각각 모를 심을 논으로 옮겨야 했고, 논을 갈게 되었을 때 모 심을 논두렁을 잘 다듬어 주어야 했다. 기계로 모를 심는 데도 모판과 비료와 제초제를 그때그때 기계에서 동이 날 적마다 올려주어야 했다.

다행히 논에 모는 잘 심었는데 기계로 하는 일이라 기계가 심지 못하는 공간이 나오고 또 기계로 모가 빠지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그런 부분들은 일일이 논에 들어가서 직접 손으로 심어야 했다. 그 이후에도 벼농사는 논에 물을 대었다가 빠지거나 마르면 다시 물을 넣어주고 잡초를 뽑아주어야 했다.

아내도 같이 따라 내려왔는데 아내가 함께 내려오니 밭을 가꾸기 시작했다. 5월 초에 고향집 옆 남새밭에 고추 모종을 130여 주 심었는데 1주나 2주마다 내려와서 약을 치고 물을 주면서 정성스럽게 키웠다.

7월 말에 처음으로 25kg의 빨간 고추를 수확하게 되었다. 여름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시골집 마당에서 고추를 말렸는데 다시 서울로 상경을 하게 되어서 말리던 고추를 모두 싸서 서울로 가져갔다.

서울 집도 남향이라 현관에도 햇볕이 잘 들어서 태양초를 만드느라고 잘 말렸는데 며칠 후에 장마가 왔다. 정성스럽게 말리던 고추에 군데군데 곰팡이가 피었다. 결국은 첫 수확의 고추는 음식 재료로 사용하지 못하고 자연으로 되돌려 줄 수밖에 없었다.

 

겨울을 넘긴 황칠나무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정진권
겨울을 넘긴 황칠나무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정진권

그리고 고향에는 1만㎡(약 1정보) 정도 되는 나지막한 산이 있는데 황칠나무와 산마늘 모종을 심었다. 황칠나무는 정말 키우고 싶었던 나무인데 추위를 워낙 타기 때문에 재배가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2020년 봄에 한 그루를 집 뒷밭에 심어보니 겨울에도 죽지 않고 버텨온 터라 일단 황칠나무 묘목 20여 주를 사서 산 아랫녘에 심었다. 산마늘도 산 중턱 660㎡(약 200평)에 심었는데 여름에는 그야말로 모두 죽은 듯이 사라졌다.

아내가 고향에 따라 내려와서 함께 산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같이 내려와서 고향땅을 밟아 살면 좋고 안 되면 혼자서 살아갈 요량이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자연을 접하는 시골에서 정착하기를 바라지만 반대로 대부분의 여성들은 자녀들이 있는 도시 생활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내가 계속 따라 내려오고 농사일에도 재미를 붙이는 것 같기는 하지만 과연 계속해서 함께 농촌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종종 다툼이 일어나고 또 그 후유증을 메우는 일들이 생겨났다.

다툼이 있고 난 이후에도 아내는 고향에서 농사짓는 일에 매우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아내는 서울에서도 시간만 나면 주로 농민 방송을 틀어서 농촌 생활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나도 차츰 농촌생활에 있어서 아내에 대한 믿음이 생기기 시작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아내가 함께 귀농하여 내 고향에서 전원생활을 한다는 것은 나에게는 큰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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